‘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요즘은 결혼식장에 온통 '웨딩홀'이란 이름이 붙지만, 2000년 이전만 해도 모두 '예식장'이었죠.
과거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있었던 부산역과 범일동 중심으로 예식장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또 미남로터리, 연산로터리, 양정로터리, 동래로터리 등 로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기도 했죠. 주말이나 '길일'에는 예식장 밀집 지역이 하객으로 붐볐다고 하죠.
부산에는 새마당예식장, 축복예식장, 행복예식장, 올림픽예식장, 금강예식장, 고려예식장, 새부산예식장, 백조예식장, 영남예식장, 경보예식장 등 수많은 예식장이 있었는데요. 혼인건수가 줄어들고, 결혼식 트렌드가 바뀌면서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곳들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 악재까지 덮치면서 40년 동안 결혼식장 자리를 지켜온 '새마당 예식장'도 끝내 문을 닫게 됐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예식장,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스타일 웨딩홀(구. 새마당 예식장)
2015년 6월에 부산역 앞 스타일웨딩홀에서 결혼했어요. 부모님께서 하객들 오기 편한 곳에서 하길 원하셔서 이곳으로 선택했어요. 친정 언니도 여기서 했고요. 당시 메르스 때문에 걱정했던 기억도 나네요. 업체 측 실수로 결혼식 영상이 녹화가 안 돼서 그때는 엄청 속상하고 화도 났는데, 정중하게 사과 해주시고 환불 처리도 해주셔서 마음이 좀 누그러지긴 했어요. 새마당 예식장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와서 우리 아이도 거기서 결혼했으면 했는데, 없어졌단 소식 듣고는 많이 아쉬웠네요./ 부산 서구 37세 박희진
#경보예식장
저희 부모님은 1991년 4월 7일 북구 구포동에 있는 경보예식장에서 결혼하셨어요. 중매로 만나 보름 만에 결혼하기로 하셨대요. 결혼식 올릴 돈이 없었는데 아빠 동네 모임 분들이 10만 원씩 모아서 200만 원으로 식 올리셨대요. 예식에 손님들이 엄청 많이 왔었다네요. 결혼하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두 분 아직도 알콩달콩 잘 사시는 모습 보면 너무 행복해요!/ 부산 강서구 30세 홍*진
#남태평양호텔 웨딩홀
저희 부모님은 1997년에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남태평양호텔에서 결혼하셨대요. 어머니가 술을 못하시는데 결혼식 정신없이 치르시고 피로연에서 술을 딱 한 잔 마셨는데 너무 취하셔서 그날 신혼여행도 못가셨대요. 그 이후로 저랑 동생 낳으시고 지금까지 사이좋게 잘 지내십니다./ 경남 김해시 24세 이*민
■ 예식장이 웨딩홀이 되기까지
부산 최초의 예식장은 1950년대 말 중구 대청동에 생긴 '대청장 예식장'이었습니다.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이용하던 곳으로, 신부들은 개조한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고 합니다. 대청장 예식장이 생기기 이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로 교회나 절을 이용하거나 '백화당' '미화당' 등 댄스홀을 빌려서 예식을 올렸다고 하네요.
1960년대에는 중구 광복동을 중심으로 예식장 거리가 생겼습니다. 신신예식장, 청탑예식장, 미화예식장, 서울예식장 등이 이곳에 들어섰죠. 광복동 예식장들은 1970년대 범일동 '옛 조방' 앞에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점점 명맥을 잃어갑니다.
이 시기 시외·고속버스터미널을 모두 갖춘 범일동, 부산역이 있는 초량동 인근에 예식장이 생겨납니다. 금탑예식장, 영남예식장, 동화예식장, 국도예식장, 행운예식장이 생겨났죠.
옛 조방 앞은 80년~90년대까지도 예식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행복 예식장, 축복 예식장이 큰 인기를 끌었죠. 한국웨딩패션협동조합 유동학 이사는 "옛 조방 앞에 있던 행복예식장, 축복예식장은 예식을 30~40분 간격으로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그 예식장에 뷔페가 없어서 식권을 나눠주면 주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엔 갈비탕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예전엔 '결혼식 피로연' 하면 갈비탕이었죠.
게다가 범일동에는 한복과 예물, 혼수품을 파는 부산진시장도 있고, 조금 더 가면 귀금속 상가도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경남 마산, 창원, 진주 등지에서 온 신랑 신부 부모들이 시외버스 타고 와서 결혼식장 둘러보고, 예물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원스톱' 시스템이었다고 하네요.
1980년대 들어서는 지역별로 예식장이 분산됩니다. 부산역 옆에는 '새마당 예식장', 동래역 근처에는 '청기와 예식장', 연산교차로에는 '목화예식장' 등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호텔 결혼식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호텔 결혼식이 국민 위화감을 조성하고, 도심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것이었죠. 부산시도 이 시기에 호텔 업주들에게 예식업을 자진 폐업하라고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호텔 업주들은 "부당한 간섭"이라면서 맞서기도 했죠. 1994년 8월부터는 특2급 이하 관광호텔에서는 결혼 예식업이 허용됐습니다. 1999년 초부터는 특1급 호텔의 예식장 영업도 허용됐죠.
요즘도 예식장을 이용하면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1980년대에도 그랬습니다. <부산일보> 1986년 4월 23일 자에는 이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소비자는 결혼식을 올릴 장소만 이용하려고 예식장을 찾지만, 대부분의 예식장이 예식실 임대의 조건으로 신부 드레스와 미용, 사진 등을 이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빌린 드레스가 깨끗하지 않거나, 결혼식 사진이 잘못 나와서 소비자보호단체에 고발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네요.
결혼식 자체가 경사지만, '이왕이면 좋은 날'을 따지는 경우도 많죠. 흔히 '길일'이라 불리는 날엔 결혼식이 몰리고, 예식장이 밀집된 지역에는 하객과 차량이 뒤섞여 심한 교통난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 1991년 10월 28일 자에 따르면, 전날인 27일은 오복이 겹친다는 '오합길일'이어서 평소보다 2~3배 많은 예식이 치러지기도 했다네요.
반면, '윤달'에는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죠. 여름철도 결혼 비수기죠. <부산일보> 1998년 6월 25일 자에는 예식장업계가 3중 악재로 허덕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예식장업계에서는 '성수기가 한 해 6개월 정도이나 윤달이 끼어 5개월 장사로 줄었다'는 한탄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결혼 트렌드가 바뀝니다. 변화의 중심에는 1997년 문을 연 '금강웨딩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교통의 요충지인 미남로타리 인근에 위치한 데다 유럽풍으로 지어져 당시 아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엔 주말마다 홀 4개 예약이 꽉 차서 '예약쟁탈전'이 벌어졌고, 예식이 있는 날에는 미남교차로 인근에 차가 많아서 유턴을 못 할 정도였다고도 하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식장'이란 이름 대신 '웨딩홀'이란 이름을 쓰는 곳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예스러운 느낌을 바꾸기 위해서 리모델링하는 업체들도 많아졌죠. 그리고 '뷔페'가 점점 중요해집니다. 그러면서 '웨딩홀 사업'은 결국 '뷔페 사업'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부산의 유명 뷔페 브랜드 '더파티'도 'W웨딩'을 함께 운영하고 있죠.
과거엔 양가 부모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이 진행됐다면 요즘엔 신랑 신부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죠. 주례 없는 결혼식, 신부 단독 입장, 신랑 신부가 직접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것도 요즘 트렌드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또 특히나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이 생겨나면서 웨딩홀별로 가격이나 조건이 한눈에 비교가 되면서 웨딩홀들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게 됐는데요. 2020년부터는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나 결혼 문화가 또 한 번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죠. 10년 뒤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 그때 그 사람
부산역 인근에는 40년 동안 자리를 지킨 예식장 업계의 '터줏대감'이 있었습니다. 1981년 도시철도 부산역 4번 출구 앞에 문을 연 '새마당 예식장'이죠. 새마당 예식장은 스타일 웨딩홀로,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로 이름이 바뀝니다. 취재진은 새마당 예식장의 후신, 스타일 웨딩홀의 이사였던 송병윤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송 씨는 새마당 예식장 상담 실장이었던 어머니를 도와 대학생 때부터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 새마당 예식장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부산역과 가깝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죠. 요즘은 예식 시간이 70분, 90분으로 길어지는 추세이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예식 시간이 40~50분 정도로 짧았는데요. 송 씨는 “홀이 5~6개 정도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토요일에는 하루에 40~50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풀타임으로 예식이 돌아갔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결혼식 문화가 급변합니다. 예식장에서 웨딩홀로 이름이 바뀌는 추세였죠. 이름뿐 아니라 트렌드에 따라가려면 뷔페도 운영해야 하고, 시설도 리모델링해야 했습니다. 당시 새마당 예식장의 임채수 대표는 상담실장인 송 씨의 어머니에게 예식장 운영을 맡깁니다.
새마당 예식장은 2000년 후반에 스타일 웨딩홀로 재탄생합니다. 새마당이란 이름은 1910~20년대에 부산역 일대가 매립되면서 이곳을 새마당이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하는데요. 정겨운 데다 이미 사람들에게 친숙하기도 해서 예식장 이름을 바꿀 당시에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점 세련된 결혼식장을 찾는 게 시대의 흐름이었기에 결국 스타일 웨딩홀로 이름을 바꿨죠. 그래도 한동안은 ‘구 새마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붙였다고 합니다. 토목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였던 송 씨는 웨딩홀 운영을 돕기 위해 2013년부터 웨딩홀 운영 전반을 도맡았죠.
2010년대 이후부터는 웨딩 트렌드가 더 빠르게 변했습니다. 2010년 중반에는 ‘하우스 웨딩’이 인기를 끌었죠. 대규모 하객을 받기보다는 소규모로, 더 고급스럽게 하는 결혼식 형태를 일컫습니다. 더 고급스러운 예식장을 만들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도 새롭게 바꾸고, 2017년엔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외관도 완전히 새롭게 바꿨죠.
“결혼식 트렌드는 서양 문화를 많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서울로 가장 먼저 유입이 되고, 다시 지역으로 내려오는 구조였죠. 벤치마킹하려고 서울도 자주 가고, 좋은 곳도 많이 갔는데 트렌드가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송 씨는 웨딩업에서 손을 떼고 다시 토목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블래어 하우스웨딩 자리에는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이 들어왔죠. 웨딩홀 운영은 좀 더 젊은 감각의 대표가 맡고, 송 씨의 어머니는 뷔페를 운영했습니다. 웨딩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운영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잘 버텨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이 넘도록 일상을 멈추게 한 코로나19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지난해 이곳마저 문을 닫으면서, 새마당 예식장의 4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까 어머니가 새마당에서 결혼하시고, 따님이 또 웨딩홀에 결혼하러 오신 케이스도 있었어요. 오래된 예식장이다 보니 건물이 낡기는 했지만, 이 자리를 지킴으로써 어떤 분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었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봤을 새마당 예식장. 터줏대감의 퇴장에서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