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동보서적 앞 기다림도 추억이 됐다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부산 서면 만남의 장소였던 동보서적 2010년 모습. 지금 이 자리에는 화장품 판매점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부산 서면 만남의 장소였던 동보서적 2010년 모습. 지금 이 자리에는 화장품 판매점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

“동보서적 앞에서 만나자!”

30년 동안 부산 시민의 약속 장소였던 곳, 동보서적이 문을 닫은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동보서적을 모르는 세대는 이곳을 옷 가게로 알고 있을 테죠.

과거 부산에는 동보서적과 같은 향토 서점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면 권역엔 동보서적과 영광도서가 있고, 남포 권역엔 문우당, 광복문고, 문창서점, 남포문고 등이 있었죠.

보수동 책방골목에도 골목마다 헌책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 전 가장 큰 규모인 대우서점이 문을 닫았고, 최근에는 오피스텔 건립 공사로 골목 입구를 지키던 서점 8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서 옛 정취를 느끼기 어려워졌죠.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꺼내 읽던 그 시절, 부산의 서점과 함께 추억을 새긴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동보서적

2002년 부산 서면 동보서적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2002년 부산 서면 동보서적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2004년 동보서적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당시 영풍문고 서면점이 쥬디스태화 신관에 오픈해서 고객인 척 염탐 갔던 기억도 나네요. 영광도서와 동보서적이 라이벌 관계였지만, 서면에 대기업 서점들이 차례로 생기면서 향토 서점이 힘을 모았던 기억도 나요. 홈플러스 아시아드·센텀시티점에 동보서적 지점도 있어서 물품 배달도 갔었죠. 그리고 당시엔 콘서트 티켓 판매처가 주로 대형서점이어서 아이돌 팬들이 줄 서 있던 모습도 생각나네요./ 부산 북구 41세 김**


#대우서점

2020년 8월 보수동 책방골목의 모습. 대우서점 김종훈(왼쪽) 사장. 부산일보DB2020년 8월 보수동 책방골목의 모습. 대우서점 김종훈(왼쪽) 사장. 부산일보DB

20년 전쯤 사진학과 학부 시절 때 보수동 책방골목에 있던 대우서점을 알게 됐어요. 대우서점은 디자인·미술 도서 전문점이라 구하기 힘든 책들을 참 많이 갖고 있던 곳이었죠. 사장님과 친분이 쌓여서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사진집을 부탁드렸는데, 덕분에 일본 인쇄판 사진집을 상당히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인쇄 기술과 일본 기술에 차이가 있어서 같은 사진집도 일본이나 독일판 사진집이 최고였죠. 없어져서 참 아쉬운 공간입니다. / 부산 동래구 43세 장정우


#문우당서점

문우당 서점은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 옆에 위치한 데다 남포동 번화가와도 가까워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죠. 사진은 2010년 10월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문우당 서점은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 옆에 위치한 데다 남포동 번화가와도 가까워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죠. 사진은 2010년 10월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문우당은 친구들 만날 때 만날 장소로 정해지곤 했어요. 일단 거기서 만나 극장가를 가거나 커피숍을 가거나 아니면 거리를 쏘다니거나 했었죠. 친구가 좀 늦어지거나 내가 일찍 도착한 것 같으면 서점 안 책들을 둘러보고 읽어볼 수 있어서 좋은 장소였어요. 그러다 책에 빠지면 친구는 밖에서, 나는 서점 안에서 기다리며 서로 화내는 '웃픈(웃기면서 슬픈)' 상황도 생겼던 기억이 나네요./ 부산 부산진구 54세 여상은


■ 사라지는 책방

동보서적은 1980년 부산 서면 중앙대로 큰 길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단골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동보서적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상대가 늦으면 그 김에 책 구경도 하곤 했습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서점에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려는 학생부터 아이 손잡고 동화책을 사러 나온 가족, 시나 소설책을 보러 온 문학소년·소녀, 연구에 필요한 책을 구하는 대학원생까지.

동보서적은 지역 문화계에도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서점 한 쪽의 공간을 지역 작가와 지역 출판사에게 내어주기도 했죠. 지역 출판사가 펴낸 책과 지역 문인이 쓴 책을 소개하는 월간 서평지 '책소식'도 발행했습니다. '어린이 글쓰기 공모대회'나 '청소년연극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열어 학생 때부터 문화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서울의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동보서적과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왔습니다. 대형 서점의 공세에도 여전히 발길은 이어졌지만, 책 구매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다가, 그 책을 스마트폰으로 찍어가서는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죠. 인터파크, 알라딘, 예스24 등 온라인 서점이 점점 몸집을 불려가던 때였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킬 것만 같던 동보서적은 2010년 10월 1일, 결국 문을 닫고 맙니다. 당시 서점 측은 폐업 이유에 대해 "5년간 누적된 적자로 경영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설명했습니다.

2002년 서울의 대형 서점 교보문고의 부산 진출을 앞두고 부산지역 문학인들이 동보서적 앞에서 교보문고 진출 반대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DB2002년 서울의 대형 서점 교보문고의 부산 진출을 앞두고 부산지역 문학인들이 동보서적 앞에서 교보문고 진출 반대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DB

서점의 운영난은 부산의 오랜 문화유산인 보수동 책방골목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70여 년을 이어온 부산의 문화유산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헌책을 내다 파는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책방 골목이 형성됐습니다. 1970~80년대엔 70개가 넘는 서점이 있었지만, 이제 서른 곳 남짓 남았습니다. 이곳도 인터넷 중고 서점과 대형 중고 서점의 부산 진출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설상가상, 이곳이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임대료는 올랐습니다. 2년 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우서점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지난해에는 골목 초입에 오피스텔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점 8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았죠.

1996년 10월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서점들은 오피스텔 건립으로 인해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부산일보 DB1996년 10월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서점들은 오피스텔 건립으로 인해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부산일보 DB

동보서적이 문을 닫은 2010년, 문우당 서점의 폐업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문우당 서점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었죠. 1955년 범내골에서 시작해 1973년 남포동 자갈치 시장 옆으로 이전했습니다. 위치 덕에 찾는 이도 많았고, 지도와 해사도서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어서 단골도 많았죠. 영광도서, 동보서적과 함께 대표적인 향토 서점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하지만 IMF 이후 경기 침체로 누적된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롯데백화점 안에 영풍문고 광복점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문우당 측은 폐업 소식을 전하면서 "어떻게든 운영해보려 했으나 오랫동안 누적된 적자 규모로 볼 때 더 이상 운영하는 것은 직원들에게마저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놓으려 한다"고 전해왔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문우당 서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서점 직원이었던 조준형 현 대표가 서점을 인수하면서 명맥을 이어갑니다. 5층 규모였던 문우당 서점은 남포문고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9년에는 중앙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겨 67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문우당 서점은 자갈치 시장 옆에서 남포지하상가 11번 출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9년 중앙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깁니다. 이 사진은 남포 지하상가 인근에 있던 2018년의 문우당 서점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문우당 서점은 자갈치 시장 옆에서 남포지하상가 11번 출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9년 중앙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깁니다. 이 사진은 남포 지하상가 인근에 있던 2018년의 문우당 서점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 그때 그 사람

취재진은 1978년부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대우서점을 운영한 김종훈 사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대우서점은 책방골목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점이었는데요. 임대료 상승과 보수동 책방골목의 개발 압력 등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2020년 보수동을 떠나 섬진강 자락인 전남 구례군으로 점포를 옮겼습니다. 김 사장은 <부산일보>의 연락에 반가운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내 대우서점을 운영한 김종훈 사장. 부산일보DB보수동 책방골목 내 대우서점을 운영한 김종훈 사장. 부산일보DB

김 사장은 1976년 제대 후 부산에 정착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책방을 들락거리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김 사장은 숙소인 동광동에서 가까운 보수동 책방골목을 자주 드나들었죠. 단골 책방에서는 손님들이 말하는 책을 찾아주기도 하면서, 책방 주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1978년 가을쯤, 대구서점 사장이 책방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만사 제쳐놓고,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책방을 인수했습니다. 당시엔 돈이 없던 터라, 간판도 최소한으로 바꾸기 위해 '대구서점'에서 'ㄱ'만 바꿔 대우서점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지어놓고 보니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 사장은 책방을 물려받으면서, 전문화 전략을 세웠습니다. 만화나 무협지, 아동도서 등을 골라 내 다른 책방에 넘겼습니다. 그 자리를 인문학 서적과 대학교재, 원서 등 전문서적으로 채워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다른 서점에선 취급하지 않는 책이었죠.

전문 서적으로 채우다 보니,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나 논문을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자료를 찾을 수있는 방법이 책밖에 없었죠. 게다가 김 사장은 책의 면면을 알고 있어서, 필요한 책을 이야기하면 그 많은 책 더미 사이에서 척척 골라내기도 했습니다. 이 능력이 입소문을 타면서 교수나 선배 소개로 이곳에 발을 들인 이들이 오랜 단골이 되기도 했죠.

단골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책방의 규모도 점점 커졌습니다. 한 칸짜리 서점은 네 칸으로 늘어났습니다. 책에 목마른 단골을 모아 '대우독서회'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우독서회는 김 사장이 떠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네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전성기였습니다. 특히나 새학기에는 교재나 참고서를 사러오는 사람들이 많아 골목을 지나다니기 힘든 정도였죠.

1999년 2월 28일, 새학기를 앞두고 참고서 등을 구입하기 위해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1999년 2월 28일, 새학기를 앞두고 참고서 등을 구입하기 위해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2010년에 접어들어서자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새학기 특수가 없어졌다는 것. 인터넷이 발달하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갖게 된 이후부터는 책방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여기가 아니라도 책을 구할 수 있게 된 거죠. 나도 인터넷 판매를 꽤 일찍부터 시작하긴 했는데 관리할 능력도 없었고, 여기 오는 손님 챙기기 바쁘니까 인터넷 활용을 못한 거죠. 그게 두고두고 아쉬워요."

줄어든 손님 만큼 매출도 떨어졌지만, 한 번 오른 임차료는 내릴 줄을 몰랐습니다. 특히나 점포 네 곳을 빌린 김 사장의 임차료 부담은 더욱 커졌습니다. 설상가상 2018년 연말에는 임차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면서 막막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보수동을 지키고 싶어 점포를 매입하는 방법도 알아봤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죠.

30만 권이나 되는 책을 옮길 곳을 찾다, 지인의 소개로 섬진강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정착한 곳은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구례였죠. 지금은 북카페처럼 커피를 마시며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우서점이란 이름은 '섬진강 책사랑방'으로 바꿨습니다. 사랑방처럼 들러, 책을 보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된 거죠.

보수동에서 시작된 인연은 섬진강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우서점이 옮겨갔다는 소식에 부산·경남뿐 아니라 경북 서울 지역에서도 찾아옵니다. "보수동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우서점을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신 분들께 참 감사하죠. 책을 아끼는 분들이 일부러 시간내서 와주신 모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네요. 그분들 덕분에 대우서점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요."

어쩔 수없이 보수동을 떠났지만, 옛 모습을 잃어가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이야기에 아직도 마음이 아립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 문화의 자존심이에요. 부산시나 중구청에서도 이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참 안타깝죠. 부산 시민들이 책방골목을 꼭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