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무아·필하모니, 청춘을 보낸 음악감상실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오디오 장비가 귀했던 1960년~1970년에는 음악감상실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팝 음악을 듣곤 했죠. 사진은 1991년 부산대 앞에 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마술피리'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오디오 장비가 귀했던 1960년~1970년에는 음악감상실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팝 음악을 듣곤 했죠. 사진은 1991년 부산대 앞에 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마술피리'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클래식이나 팝송, 록, 댄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죠. 또 마니아들은 집에 고가의 스피커를 두고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개인 오디오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엔 ‘음악감상실’이 유행했습니다. 다 같이 모여 DJ가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때때로 다른 이들의사연과 신청곡을 함께 듣기도 했죠. 음악다방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도 있었고, 극장식으로 의자를 두고 오로지 음악만 듣는 곳도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고전 음악감상실 ‘필하모니’ ‘마술피리’뿐 아니라, 팝 음악을 틀어주던 ‘무아’와 ‘랩소디’ 등등. 추억의 음악 감상실과 함께 청춘을 보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무아

1970~90년대 부산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음악감상실 '무아'의 내부입니다. 사진은 1995년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1970~90년대 부산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음악감상실 '무아'의 내부입니다. 사진은 1995년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

무아는 87학번인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갔던 곳이에요. 국문과 다니던 친구랑 거기가 아지트였죠. 디제이가 전해주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 마시고 속닥거리다가 졸다가. 피곤한 젊음을 쉬었던 곳이에요. 서로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지금 생각하면 대책도 없는 고민을 이야기했었던 것 같아요. 서로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 이상 없었으니까요. 그 친구와 이제는 연락이 끊어졌지만, 친구도 그때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산 부산진구 54세 여상은

#필하모니

스무 살 때 광복동에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에 일본식 허름한 목조건물 2층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를 따라갔는데 거기가 필하모니였어시요. 그때 음악이 '보테시니'의 '그랜드 듀오 콘체르탄트'였는데, 좋은 오디오로 들으니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부터 하루도 안빠지고 매일 음악 들으러 갔어요. 커피도 그때 처음으로 마셔봤네요. 그날 이후로 클래식은 제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짚고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이 됐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필하모니를 운영해주신 조 실장님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산 해운대구 58세 이욱희


■ 고단한 청춘의 휴식처, 음악감상실

광복 이후 ‘클래식’ 음악이 고급문화로 여겨지면서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이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도 클래식 바람이 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부산 곳곳에서 음악감상회가 열립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을 전문가들이 해설해주는 방식이었죠. 처음엔 주로 다방에서 감상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다 전문적인 음악감상실까지 등장합니다. 특히 광복·남포동에 클래식을 틀어주던 음악다방·음악감상실이 모여 있었죠. 부산에는 강변, 에덴다방, 오아시스, 크라식, 미화당음악실, 필하모니 등등이 있었습니다.

1981년 광복동에 문을 연 고전음악감상실 '필하모니'는 여러 번 문을 여닫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1988년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1981년 광복동에 문을 연 고전음악감상실 '필하모니'는 여러 번 문을 여닫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1988년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

필하모니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곳인데요. 1981년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앞에 문을 열었으나, 1989년 불이 나면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1990년엔 필하모니 재건을 위한 음악회까지 열렸다고 하니, 당시 부산 음악계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었는 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광복동에서 광안리, 김해로 옮겼던 필하모니는 2002년 부산 남구 대연동 문화회관 옆에 음악 카페 형태로 문을 열었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1990년 필하모니 음악감상실 재건을 위해 부산의 음악인들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고 하네요. 위 사진은 1990년 9월 12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1990년 필하모니 음악감상실 재건을 위해 부산의 음악인들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고 하네요. 위 사진은 1990년 9월 12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클래식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대중음악 ‘팝송’이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970년대엔 부산의 전설적인 음악감상실 ‘무아’가 문을 열죠. 광복동 용두산공원 계단 옆 5층 건물 중 4층에 있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아에 죽치고 앉아있는 ‘죽쟁이’도 있었죠.

무아는 오전 시간대나 오후 5시~6시쯤 클래식 음악을 틀기도 했지만, 주로 ‘팝’ 음악을 틀었습니다. 낮에는 대학생, 재수생이 저녁에는 직장인이 찾아 와 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는 곳이었죠.

이 시기에 광복동의 ‘별들의 고향’도 인기였습니다. 무아가 극장식 의자에 앉아 음악을 즐기는 곳이었다면, 별들의 고향은 술과 함께 노래를 곁들이는 펍 레스토랑에 가까웠죠. 서면에는 ‘랩소디’, ‘그라마폰’, ‘예그린’과 같은 음악감상실도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접어들면서 가정용 오디오와 CD플레이어 등이 보급되면서, 음악 감상실을 찾는 발길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DJ뿐 아니라 누구나 음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죠. 이제는 모여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생소할 정도로, 추억 속의 공간이 되고 말았네요.

1970년~80년 대 청춘들의 휴식처가 된 무아 음악실은 1990년대 폐쇄 위기를 맞습니다. 광복동에서 부산대로 옮겨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죠. 위 사진은 1994년 7월 4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1970년~80년 대 청춘들의 휴식처가 된 무아 음악실은 1990년대 폐쇄 위기를 맞습니다. 광복동에서 부산대로 옮겨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죠. 위 사진은 1994년 7월 4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

■그때 그 사람

취재진은 무아의 전성기 시절 DJ였던 최인락 씨를 만났습니다. 최 씨는 1980년 초까지 형의 이름인 ‘최길락’으로 활동을 하다, 1983년 이후로는 본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탓에 아직도 그를 ‘최길락’으로 아는 분들도 많다고 하네요. 지금은 부산교통방송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 씨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커 왔습니다. 그룹 사운드 활동을 하는 형들 덕분에 초등학생 때부터 팝송을 자주 들었다고 하네요. LP 속지에 빼곡하게 쓰인 곡 정보들을 보면서 음악의 세계를 넓혀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발소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을 듣는데 ‘비틀스’의 ‘옐로우 서브마린(Yellow submarine‧노란 잠수함)’이 나오더라고요. 혼잣말로 노래 제목을 맞히니까 이발사가 깜짝 놀라면서 다른 노래도 맞혀보라며 신기해 하셨죠. 어릴 때부터 또래들보다는 팝송을 많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DJ 일은 남포극장 자리에 있던 ‘돌 다방’이란 곳에서 배웠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을 시작하다 보니, 형님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보조 DJ로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로 금방 메인 DJ가 됩니다. 그러다 1980년, 무아에 DJ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가 한 번에 붙습니다. 그때가 겨우 스무 살 이었죠.

그는 그 시절 무아의 모습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입장료를 받는 카운터가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낸 뒤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극장식으로 배치된 의자 250여 개가 놓여있었죠.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엔 DJ박스가 있었습니다. 사방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내부는 꽤 어두운 편이었는데, DJ가 있는 스튜디오만 환했다고 합니다. DJ가 바뀔 때마다 조명의 색깔도 바뀌었다고 하네요.

1980년 당시엔 입장료가 250원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곳이 100~150원 정도였으니, 그 시절 꽤 비쌌던 편이죠. 입장료를 내면 입장권을 주는데, 그곳에 신청곡과 사연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한쪽 귀퉁이를 잘라서 직원에게 전해주면 음료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분말 오렌지주스를 타 주고 겨울엔 생강차를 줬는데, 이후에는 요구르트로 통일됐다고 하네요. DJ는 5~6명 정도가 교대했습니다. 같은 시간대에 찾는 손님들이 여러 DJ를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표는 매번 바뀌었다고 하네요.


무아 4층 입구 앞에 있던 시간표에서 찍은 최인락 씨의 모습입니다. 본명이 아닌 '최길락'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니, 1983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되네요. 최인락 씨 제공무아 4층 입구 앞에 있던 시간표에서 찍은 최인락 씨의 모습입니다. 본명이 아닌 '최길락'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니, 1983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되네요. 최인락 씨 제공

사계절 중에는 겨울에 손님이 가장 많았고, 비 오는 날이면 앉을 자리가 없어서 긴 줄이 이어졌다죠. 손님이 많은 날엔 4층에서 1층까지 줄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손님이 나와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인 ‘무아 프리스테이지’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엔 무아에 가야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어요. 손님들도 음악을 듣는 깊이가 달랐죠. 당시 금지곡이었던 곡들도 무아에서는 들을 수 있었고요. 또 한 곡에 10분이 넘어가는 다소 난해한 곡들도 틀 수 있는 곳이었죠.”

최 씨는 무아에 진득하게 오래 머문 DJ는 아니었습니다. 1980~1985년 사이에 다른 라디오 방송 진행을 맡게 되면서 여러 번 들락날락합니다. 그 사이 부산CBS와 울산MBC, 제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죠. 1989년엔 부산MBC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가 됐고, 1992~1993년 즈음에 무아에서 게스트DJ로 나와 진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최 씨는 그 시절 무아를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무아 복원을 위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2019 무아 프리 스테이지’라는 행사를 열어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를 매년 이어가려 했지만,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잠시 쉬어가야만 했죠. 특히나 지난해는 무아 50주년이었다고 하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모일 수가 없어서, 올해 6월에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지금도 가끔 무아에서 멘트하는 꿈을 꾸거든요. 무아는 제 인생의 여러 페이지를 차지하는 곳이죠. 제가 평생 DJ로 살 수 있도록 해준 곳이기도 하고요. 어느 날 무아 동창회가 열리면, 무아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추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

글=서유리 기자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