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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놀이공원 미월드 대관람차 타본 사람?

  • '별다방' 이전에 '가비방'이 있었다(feat.커피체인점 원조)

  • 그 시절 '고막 남친', 음악감상실 DJ (feat.무아음악감상실)

  • 영화관에 그림 간판 기억하는 사람? (feat.부산극장)

  • 이제 곧 오피스텔이 되는 보수동 책방골목 현우서점의 마지막 인사

  • 부산 서면에 있던 양식당 '호수그릴' 아시는 분?

  • 부산 전설의 '1타강사' 김광휘, 옥진수 쌤 아는 사람?

  • ① ‘즐거운 비명’이 가득하던 곳 추억의 놀이동산

    ‘레코드 부산’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2010년 부산 부산진구 초읍 어린이대공원 내부에 있던 동마 놀이동산 입구의 모습. 부산일보 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부산은 올해 초까지 놀이공원이 하나도 없는 도시였습니다. 놀이공원에 가려면 양산이나 대구 경주 등으로 원정을 가야만 했죠.이달 31일 부산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정식으로 문을 열면서 오랜만에 들어서는 놀이공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데요.부산에도 처음부터 놀이공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7곳의 놀이공원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금강공원 놀이시설, 태종대 자유랜드, 초읍 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 롯데월드 스카이 프라자, 광안리 미월드, 광안비치랜드, 영도 월드 카니발이 차례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운영기간 만료와 시설 노후화, 각종 사건사고 등으로 인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됐는데요. 2019년 12월 마지막 남은 놀이시설인 광안비치랜드마저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민들은 이곳들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요.■ 그때 그 시절#광안비치랜드중1이었을 때 광안비치랜드에서 가수 god 멤버 손호영 씨와 함께 타가다를 탔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사람들이 잘 못알아봤었는데 저는 바로 알아채고 악수도 했어요. 손호영 씨가 끼고 있던 팔찌까지 하나 주셨어요. 그 팔찌 고이 모셔놨는데 지금은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어린 시절 부산에 놀이동산이 한참 많이 생겼는데, 갑자기 다 사라져서 아쉬운 마음이었어요. /금정구 30대 후반 전*화#미월드17~18년쯤 전에 일 마치고 광안리 회센터에서 회 먹고 미월드로 갔었죠. 친정아버지께서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를 신기해 하시면서 몇 번이고 타셨던 기억이 나네요. 신나게 놀고 집에 가려는데 가족들 차에 모두 불법주차 스티커가 붙어있었어요. 주차비 아끼려다 차량 4대 벌금만 왕창 냈었네요. 광안리하면 10대 20대들에게는 미월드랑 비치랜드는 핫한 곳이었는데 없어지니 부산이 후퇴하는 느낌이었어요. 또 놀이공원들도 시대의 흐름을 빨리 읽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경남 양산시 46세 김은결2011년 5월 촬영한 미월드의 전경입니다. 대관람차를 타면 광안대교와 광안리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왔었죠. 부산일보 DB#부산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어린이날이나 주말이면 부모님이나 작은아빠가 사촌언니, 사촌동생, 오빠, 저 데리고 항상 어린이 대공원에 놀이기구 타러 갔었어요. 귀신의집, 88열차, 바이킹, 아폴로, 알라딘, 회전목마 등등 이젠 추억이네요. 초등학생 때는 단체로 놀러가서 밀가루 사탕 먹기, 보물찾기도 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놀이기구 타려고 입구에서 키도 재보고요. 없어진다는 얘기 듣고 많이 슬프고 안타까웠어요. 어릴 적부터 가족,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았던 장소인데 이제는 기억과 사진 속에만 남아있다는 게 많이 안타깝죠. 그래도 부산에 다시 롯데월드가 생기니 기분은 좋더라고요. 이젠 오랫동안 있었으면 좋겠어요. / 부산 동구 30세 김민서1993년 4월 부산 초읍 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 부산일보 DB#태종대 자유랜드영도 주민이라 유치원, 어린이집 소풍 필수 코스였어요. 주로 소풍으로 많이 갔고, 가족들이랑은 주말에 자주 갔어요. 초등학생 땐 친구들이랑 가기도 했는데 주로 회전목마나 다람쥐통 청룡열차 범버카 많이 탔어요. 바이킹은 안전바가 붕붕 떠서 무서워서 울면서 내려달라고도 했었는데 다른 놀이동산에 가면 그런 현상이 없다는 걸 알고 충격받기도 했어요. 영도에 놀이동산이 있어서 어릴 땐 원 없이 놀이동산에 갔는데 막상 없어진다 하니 낡았어도 너무 아쉬웠어요. 마지막 개장일 전에 친구들이랑 갔었는데 그때 사진기가 없어서 사진을 못 남긴 게 너무 아쉽네요. / 부산 영도구 29세 최**1988년 5월 개장 직후 태종대 자유랜드를 찾은 시민들의 모습. 어린이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 뒤로는 롤러코스터도 보이네요. 부산일보 DB■ 부산 놀이공원의 역사부산에 처음 생긴 놀이시설이 들어선 곳은 동래 금강공원이었습니다. 1973년 6월에 놀이시설이 들어서면서 1980년대 최고의 유원지로 이름을 날렸는데요. 놀이기구뿐만 아니라 동물원, 식물원, 케이블카까지 있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시설이 낙후된 데다 부산에 대형 놀이공원이 들어서면서 이용자가 점점 줄어들었고, 2013년 6월 결국 문을 닫게 됐습니다.부산의 첫 놀이공원이자 1980년대 최고의 유원지로 꼽혔던 금강공원 놀이시설. 사진은 2009년 찾는 이 없이 한산한 놀이공원의 모습. 부산일보 DB1988년 5월, 영도구에 태종대 자유랜드가 문을 열었는데요. 귀신의 집, 청룡열차, 바이킹, 타가다 등의 몰이 시설과 함께 해양박물관, 해수풀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금강공원 놀이시설보다 규모도 더 크고, 유명 관광지인 태종대와도 가까워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다 근처에 있다 보니 해풍으로 인해 놀이시설이 부식됐고, 계약 만료 기간인 20년이 지나 결국 2008년 5월 문을 닫았습니다. 현재는 기구들이 모두 철거되고 주차장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태종대 자유랜드가 생기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9년 1월, 부산진구 초읍 어린이대공원에도 놀이동산이 생겼는데요. (주)동마기업에서 운영한 놀이동산입니다. 부산 나들이 1순위로 연간 70만 명이 찾을 만큼 인기가 많았는데요. 이곳 역시 놀이시설이 노후화된 데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2011년 3월 결국 폐장했습니다.위 두 놀이동산은 1990년대 부산을 대표하는 놀이동산이었는데요. <부산일보> 1990년 4월 16일 자 기사에는 ‘태종대 자유랜드 일대에는 1000여 대의 승용차 승합차들이 몰려 간선도로가 마비될 정도였으며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진입도로도 차량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시민들이 18호광장 일대에서 차에서 내려 1km가량 걸어가기도 했다’라고 적혀있습니다.1990년 4월 16일 자 <부산일보> 기사. 4월 셋째 주 주말을 맞아 태종대 자유랜드와 초읍 어린이대공원 일대에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부산일보 DB1990년대 후반에는 부산 롯데월드 스카이 프라자가 문을 열었습니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9층부터 12층을 개조해 실내 놀이공원으로 만들었는데요. 하지만 놀이시설의 진동과 소음으로 인해 백화점 이용 고객들이 불안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스카이프라자는 개장 3년 만인 1999년 5월에 문을 닫았습니다.1996년 9월 부산 롯데월드 스카이 프라자를 찾은 시민들의 모습. 당시 놀이기구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백화점 이용객들이 불안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산일보 DB2004년에는 수영구에 민락동에 미월드가 문을 열었습니다. 미월드에는 대관람차, 롤러코스터, 샷드롭, 터뷸런스, 회전목마, 회전그네, 범퍼카, 급류타기 등 20여 개의 놀이기구가 있었는데요. 주변 아파트들로부터 소음 민원이 제기되면서 영업시간 제한 등의 조치를 받다 결국 2013년 6월 문을 닫게 됐습니다.광안비치랜드도 2004년부터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어른이(어린이 같은 어른)’들 사이에서 바이킹과 타가디스코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죠. 2019년 12월까지 운영을 이어가다 영업을 끝냈고, 이 자리에는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입니다.광안비치랜드는 준주거지역에 들어선 놀이시설로 개장 당시부터 허가 문제를 두고 소송전이 일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2003년 본격적인 운영이 되기 전의 광안비치랜드의 모습.2007년 7월엔 이동식 테마공원인 ‘월드 카니발’이 영도에 들어섰습니다. 7월 20일 개장해 8월 31일까지 40여 일간 운영되는 놀이시설이었는데요. 그해 8월 13일, 곤돌라를 타던 일가족 5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곧바로 폐장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취재진은 그때 그 시절의 놀이동산을 운영한 이들을 수소문한 끝에, 김태훈 전 미월드 운영본부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김 전 본부장은 미월드 운영 당시 “가족분들이 도시락 싸 들고 와서 잔디밭에 앉아 음식 먹던 모습이 아직 선명하다”고 말했습니다. 미월드는 당시 ‘입장료 없는 놀이공원’이기도 했는데요. 입장료 없이 놀이기구를 탈 사람들만 이용권을 구매하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또 당시 자유이용권으로 15종의 놀이기구를 이용할 수 있어, ‘국내 최저 가격 자유이용권’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큰 사랑을 받은 놀이기구는 옥상에 설치돼 있던 ‘롤러코스터’와 높이 올라갔다가 급하강하는 ‘제트폴스’였습니다. 광안대교와 광안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관람차 ‘자이언트 휠’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미월드의 가장 큰 장점은 놀이기구를 타며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이 덕분에 MBC ‘상상원정대’와 SBS ‘런닝맨’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전 야구선수인 홍성흔 선수가 롯데자이언츠에 있을 당시 딸과 함께 자주 찾던 곳이었다고 하네요.부산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곳이었지만, 주변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미운털’이 박힌 곳이었습니다. 미월드는 주변의 아파트들은 2004년 개장 직후부터 “소음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다”며 집단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집단 민원은 영업금지 가처분 소송으로 이어졌고, 미월드 측이 소송에서 패배하면서 영업시간이 단축됐습니다.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영업을 멈출 수는 없는 상황.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건 ‘마스크’ 였습니다. 당시 여름 야간 개장 기간에 놀이공원을 찾는 이용객들에게 마스크를 무료로 나눠주면서, 가급적 고함을 지르지 말아 달라는 안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이 특이해 KBS ‘스펀지’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고 하네요.2004년 8월 부산 수영구 광안리 미월드 야간 개장 당시 소음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놀이기구를 타는 이용객들의 모습. 부산일보 DB소송 결과 야간 영업시간이 오후 9~10시로 제한되면서, 미월드 측은 영업에 큰 타격을 받게 되는데요. 미월드 측은 2005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제소를 합니다. 광안리 수변공원 일대의 도시계획 용도를 변경한 탓에 놀이공원 주변으로 아파트촌이 들어서게 됐다는 점을 호소한 거죠.이에 대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토지이용계획 등 시의 급격한 도시계획 변경으로 미월드 측이 피해를 본 것으로 판단된다”며 “시는 미월드 토지 매입 또는 교환하는 방안을 면밀히 재검토하라”는 협조 공문을 부산시에 전달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미월드 측은 결국 2007년 땅을 팔았고, 2013년 6월까지 운영을 해오다 해당 부지에 호텔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미월드 부지에 호텔 건립사업 인가가 취소되고 현재는 생활형숙박시설(레지던스) 건립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하죠.미월드 폐장 소식에 많은 시민이 안타까워했는데요. 광안비치랜드가 있긴 했지만, 그곳은 워낙 규모가 작다 보니 사실상 미월드가 부산의 마지막 놀이공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안타까운 건 당시 본부장을 맡은 김 본부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미월드는 법인이 아니라 개인이 개발한 놀이공원이었거든요. 지역에 좋은 시설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진 곳인데 인근 주민들로부터 좋은 소리 못 듣고, 문제가 생겨서 결국 땅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안타까웠죠.”김 전 본부장은 특히나 그 시절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라고 전해왔습니다. “저희가 2007년에 땅을 계약해서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일하는 분들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도 6년이 넘도록 너무나도 잘 근무를 해주셨거든요. 정말 감사하고, 더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폐장한 지 어느덧 9년. 김 전 본부장은 미월드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이제 더 좋은 시설이 부산에 들어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미월드 많이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글=서유리 기자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 ② 코끼리와의 강렬한 첫 만남, 추억의 동물원

    ‘레코드 부산’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1994년 2월 금강공원 내 동래동물원에서 코끼리를 구경하고 있는 시민들.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인터넷이 보편화 되기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형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방법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TV속 다큐멘터리에서도 코끼리나 호랑이, 사자를 볼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천지차이였죠. 동물원은 살아있는 동물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부산에는 동래동물원과 성지곡동물원, 삼정더파크 3곳의 동물원이 있었는데요. 부산의 마지막 동물원인 삼정더파크마저 문을 닫은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는 앨범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덩치가 큰 코끼리에 한 번 놀라고, 호랑이의 매서운 울음 소리에 또 한 번 놀랐던 그 시절의 그 동물원. 시민들의 기억 속 동물원은 어땠을까요? 독자들이 보내준 사연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때 그 시절동래동물원은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1982년 동래동물원을 찾은 어린이들. 부산일보 DB#동래동물원90년대 초반 5~6살때 쯤 유치원에서 동래동물원에 갔어요. 당시에는 동물원 관람 예절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먹던 간식을 코끼리에게 줬던 것 같아요. 저도 어린 마음에 신기해서 간식을 내밀었는데 코끼리가 '프흥' 하고 콧물같은 걸 제 옷에 튀겼어요. 새옷이 더러워져서 어머니께 혼날 줄 알고 꺼이꺼이 울었네요. 그 이후론 중학생 때 혼자 금강공원에 갔는데 동물들이 다들 앙상하더라고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어요. 그 동물들이 지금은 다들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갔겠죠?/ 경남 양산시 37세 권태일1995년쯤 유치원 소풍으로 금강공원 동물원에 갔어요. 점심시간에 도시락 먹는데 선생님들께서 코끼리나 동물 근처에 가서 먹으면 위험하다고 하셨었죠. 그 말을 듣고도 별 생각없이 우리 앞에서 가방을 열고 도시락을 꺼내는데 코끼리가 가방을 덥석 잡더라고요. 그 순간 밥을 뺏기기 싫어서 잡고 실랑이를 했어요. 선생님은 놀라서 달려오고. 결국 도시락 뺏겼는데 너무 분했어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음료수 하나 사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 수영구 34세 곽다솔1994년 4월 성지곡 동물원 코끼리의 모습. 성인이 보기에도 엄청난 덩치인데, 어린 아이의 눈에는 더 거대하게 보였겠죠? 부산일보 DB#성지곡동물원부산 어린이대공원에서의 추억이 무지 많은데 저는 특히나 코끼리를 너무 무서워해서 코끼리 보면 엉엉 울었대요. 사진앨범에도 코끼리앞에서 우는 사진이 있어요. 부산에 삼정더파크마저 사라져서 지금 세대 아이들을 데려갈 동물원이 없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부산에도 작게나마 동물원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금정구 전*화 30대 후반■ 부산 동물원의 역사부산의 첫 동물원은 1964년 금강공원 안에 문을 연 동래금강동물원입니다. 주로 동래동물원, 금강동물원 이란 이름으로 불렸죠. 이곳은 부산 첫 동물원일뿐 아니라 국내 첫 민간 동물원이기도 했습니다. 연면적 3만 1600㎡부지에 코끼리, 호랑이뿐 아니라 140종 860여 마리의 동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동물원이 흔치 않다보니, 휴일만 되면 동래동물원을 찾는 인파가 어마어마했습니다. 특히나 봄나들이 철인 4~5월에는 과장을 조금 더 보태 ‘사람이 많아서 땅이 보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1982년엔 부산어린이대공원 내부에 성지곡 동물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연면적 1만 4035㎡ 규모에 95종 600여 마리를 보유하고 있었죠. 동래동물원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어린이대공원에 있다보니 가족 단위뿐 아니라 어린이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당시 동물원이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동물들에 대한 관심도 높았는데요. 1970~90년대엔 동물원 동물들의 소식이 신문에 종종 실리곤 했습니다. 바다사자가 동물원의 새식구가 되었다는 소식부터, 동래동물원 어미 사자 ‘애리’가 수컷 새끼 사자 두 마리를 순산했다는 소식, 동래동물원 호랑이 ‘호순이’의 짝을 찾기 위해 전국 동물원에 청혼 사절을 보냈다는 소식, 성지곡 동물원의 수리부엉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연 부화했다는 소식 등이 실렸습니다.왼쪽 기사는 동래동물원 사자 ‘애리’가 수컷 두 마리를 순산했다는1973년 8월 15일 자 <부산일보> 기사. 오른쪽 위 기사는 동래동물원 호랑이 ‘호순이’가 짝을 찾는다는 내용이 담긴 1986년 3월 8일 자 기사. 오른쪽 아래는 1987년 3월 31일 성지곡 동물원에서 태어난 수리부엉이 사진. 부산일보 DB각종 사건 사고도 많았습니다. 1980년 7월 1일 동래동물원 사육사가 하마에게 공격을 당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또 동래동물원 관람객이 사자 우리에 뛰어들어 부상을 입는 일도 있었습니다.성지곡동물원에선 1997년 원숭이가 탈출해 1년 3개월 만에 잡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원숭이는 주택가를 떠돌면서 우유를 훔쳐 먹거나 빨래를 더럽히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하죠. 당시 이 원숭이에겐 ‘신창원 원숭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2002년 3월엔 성지곡 동물원의 명물인 코끼리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도 있었는데요. 동래동물원이 문을 닫은 후라 부산에 유일하게 남은 이 코끼리를 살리기 위해 사육사뿐 아니라 시민들도 마음을 모아 응원했지만,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1997년 12월 성지곡 동물원에서 탈출한 원숭이가 1999년 2월 5일 붙잡혔습니다. 원숭이의 표정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표정같아 보이네요. 부산일보 DB1990년대부터 두 동물원은 운영난에 시달렸습니다. 1994년 동래동물원이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문을 닫을 처지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 사하구 장림동 효림국민학교 학생들이 자발적인 성금 모금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 학교 학생들은 <부산일보>에 5만 6000원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는데요. 편지에는 “동래동물원은 우리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 가득 담겨 있으며 신기한 동물을 실제로 볼 수 있어 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학습장”이라면서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신문사 아저씨들께서도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하지만, 시민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동래동물원은 결국 2001년 11월 5일 임시휴업에 돌입했습니다. 그 다음해 1월 코끼리를 비롯한 180여 마리 동물을 모두 대전동물원에 팔고 문을 닫고 말았죠.1998년엔 성지곡 동물원도 IMF 이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IMF여파로 일부 동물의 주식 메뉴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 1998년 5월 7일자 신문에는 파인애플이나 바나나와 같은 열대과일을 먹던 원숭이들에게 국산 사과를 급여하기 시작했고, 물개들도 고등어 등 값싼 생선으로 주식을 바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성지곡 동물원 역시 운영난을 회복하지 못하고 점점 쇠퇴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물원 동물에 대한 관람객들의 인식은 점점 높아지고, 동물 보호에 대한 욕구들도 높아져갔죠. 더이상 동물원을 민간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생각한 부산시는 2000년 동래·성지곡 동물원 매입을 시도합니다. 2004년 성지곡 동물원 자리에 대규모 시립동물원을 추진하겠다는 ‘더파크 사업’ 계획이 들어서면서, 2005년 성지곡 동물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1990~2000년 동물원의 운영난에 대해 다룬 <부산일보>의 기사들입니다. 왼쪽은 동래동물원 회생을 위해 효림국민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았다는 내용을 담은 1994년 12월 6일 자 기사. 오른쪽 위는 IMF여파로 성지곡 동물들의 사료가 대체됐다는 내용을 담은 1998년 5월 7일 자 기사. 오른쪽 아래는 부산시에서 두 동물원을 인수한 뒤 폐쇄·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 담긴 2000년 6월 3일 자 기사. 부산일보 DB부산시의 동물원 조성 계획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삼정더파크’가 문을 열었는데요. 운영한 지 6년 만인 2020년 4월에 다시 문을 닫게 됐습니다. 부산시와 삼정기업은 동물원 인수 문제를 두고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요. (주)삼정기업은 부산시에 ‘5년 후 동물원을 매수하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라’며 소송을 건 상태입니다. 1심 재판에서 부산시가 승소했고, 현재는 2심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정더파크가 문을 닫은지 어언 2년째. 현재 관람객은 받지 않고 있지만, 아직 사육사들이 남아 동물들을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삼정더파크는 부산시와 운영사의 합의가 무산되면서 2020년 4월 25일부터 운영을 중단했습니다. 부산일보DB■ 그때 그 사람취재진은 안동수 삼정더파크 운영본부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안 본부장은 과거 동래동물원장을 역임하고 성지곡 동물원 물개 조련사로 일하다, 삼정더파크에서도 본부장을 맡고 있는 부산 동물원 역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안 본부장은 과거 1980~90년대 동래동물원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는 질문에 “4~5월 주말, 어린이날이면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높은 지대에서 낮은 곳을 쳐다보면 사람이 많아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땅이란 땅엔 사람들이 다 차 있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동래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동물은 단연 ‘코끼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물원 직원들은 코끼리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했다는데요. 코끼리는 후각이 매우 좋다고 하는데요. 관람객들이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코를 내밀면서 달라고 조른다고 합니다. 만약 주지 않는다면,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는데요. 코로 물을 빨아들여서 흙에 비빈 다음 사람들에게 뿌린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세탁비 물어주느라 직원들은 정신이 없었다고 하네요.또 금강공원은 과거 인기 신혼여행지이기도 했죠. 당시 신혼여행을 온 부부가 겉옷을 팔에 걸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코끼리가 옷을 낚아채서 찢어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겉보기엔 순해 보이지만, 동물원에선 맹수로 친다고 하는군요.1978년 동래동물원 코끼리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구름 인파. 부산일보 DB코끼리뿐 아니라 물개도 인기스타였습니다. 용두산 공원, 태종대와 같이 인기 관광 명소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그림엽서에 동래동물원 물개가 등장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당시 다른 동물원 물개들은 수질 등의 문제로 번식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는데, 동래동물원의 물개들은 10년 가까이 번식을 해 동물원의 효자 노릇을 톡톡이 했다고 하네요.안 본부장은 동래동물원이 문을 닫자, 성지곡 동물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성지곡 동물원에는 우리나라 세 번째 물개쇼장이 생겼는데요. 이곳에서 조련 공부를 하며 조련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성지곡 동물원 폐장 때까지 ‘동산’, ‘미미’ 등 9마리 물개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죠. “동래동물원은 저를 동물원으로 이끌어줬던 곳이고, 성지곡 동물원은 평생 뼈를 묻은 곳이죠.”1992년 성지곡 동물원 물개쇼를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 부산일보 DB2014년 삼정더파크가 문을 열었지만 운영 6년 만에 문을 닫은 상황. 부산시와 삼정기업의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아,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채 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아쉬운 마음은 시민들뿐 아니라, 안 본부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보통은 소송을 벌이고 싸울 때 ‘이게 내 거다’라는 걸로 많이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건 부산시와 삼정이 서로 ‘내 것이 아니다’로 소송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문을 닫고 있는 중에도 사육사들이 동물들을 잘 돌보고는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 나지 않고 있으니 직원들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글=서유리 기자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 ③ 태화·세원·신세화, 그 많던 향토 백화점은 다 어디로

    ‘레코드 부산’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1990년대 초·중반 향토백화점이던 서면 태화백화점은 부산에서 매출이 가장 많은 백화점이었습니다. 사진은 1999년 3월 태화백화점 영캐주얼 19개 브랜드가 디스플레이 콘테스트를 실시하던 당시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오늘날 부산의 백화점 하면 어떤 브랜드가 떠오르시나요? 롯데, 신세계, 현대, NC 정도로 압축될 수 있겠네요. 모두 부산 향토 기업이 아닌 유통 대기업이 소유한 백화점이죠.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산·경남의 향토 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들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미화당백화점, 태화백화점, 유나백화점, 세원백화점, 부산백화점, 신세화백화점 등등. 부산 어느 곳에 살았느냐에 따라 추억이 있는 백화점도 달랐겠죠?부산 곳곳에 있던 향토 백화점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하나둘씩 스러지다 대기업 백화점의 부산 진출과 IMF로 인해 2000년대에는 모두 문을 닫게 되는데요. 새 학기나 명절 때 들뜬 마음으로 새 옷, 새 신발을 사러 갔던 그 시절 백화점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볼까요?■ 그때 그 시절1991년 미화당 백화점 정문의 모습입니다. 광복동 상권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약속의 장소로도 유명했죠. 부산일보DB#미화당백화점, 유나백화점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었던 학창 시절, 미화당백화점과 유나백화점은 그 시절 남포동에서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죠. 지금도 택시를 탈 때 '옛날 미화당백화점 앞', '옛날 유나백화점 앞'이라고 말하면, 젊은 기사들도 다 알아들으시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런 부산의 랜드마크가 사라진 게 너무나 아쉽네요. / 부산 서구 51세 곽영례1994년 촬영한 태화쇼핑의 전경입니다. 당시 삐삐를 확인하려 태화쇼핑 앞 공중전화 부스 앞에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죠. 부산일보DB#태화백화점어릴 때 경남공고 근처에 살아서 태화백화점이 가까웠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태화백화점 새로 지었을 때 엘리베이터 타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태화백화점에 찜질방도 생겨서 엄마랑 목욕 갔다 왔던 기억도 나네요. 남들은 시내라 다 꾸미고 오는 데 저는 목욕 가방 옆구리에 들고 갔었네요. 삐삐 나오던 시절에는 태화백화점 앞 공중전화 부스에 삐삐 듣느라 줄 선 모습도 기억나네요. 롯데·현대 백화점 생기기 전만 해도 나름 명품 백화점이었고 손님도 많았는데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없어져 아쉽습니다. / 부산 동구 43세 노진희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이 있던 세원백화점 1995년 전경. 맥도날드도 함께 입점해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찾던 곳이죠. 부산일보DB#세원백화점, 부산백화점진주에 살았지만, 친가·외가가 전부 부산이라 부산에 정말 자주 갔어요. 90년대 중·후반 버스 터미널과 같이 있던 세원백화점, 부산백화점의 추억은 20년이 지나도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있습니다. 부산백화점 1층 구두 냄새랑 롯데리아도 기억나고요. 특히 세원백화점에는 맥도날드가 있었는데, 진주엔 없어서 무조건 들렸었죠. 당시에 해피밀 장난감 모으느라요. 백화점 문 닫은 뒤로는 해피밀 세트 못 먹는 게 정말 아쉬웠어요. 터미널도 이전해서 노포동 터미널 처음 이용했을 땐 '내가 알던 부산이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경남 진주시 32세 이현*1993년 부산백화점의 전경. 고속버스 터미널과 함께 운영돼 타지역 사람들에게 부산의 첫 이미지가 되기도 했죠. 현재 이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부산일보DB■ 향토 백화점의 번영과 쇠퇴부산의 첫 백화점은 중구 광복동의 '미화당백화점'이었습니다. 1949년 미화당이란 이름으로 운영을 하다 1969년 화재로 건물이 불에 타 1970년 신축 재개장을 했습니다. 1984년 본관, 별관을 개축해 운영했죠. 미화당 백화점엔 용두산 공원으로 연결된 철제 다리도 있어서 백화점 이용객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 곳이었습니다.미화당 백화점에서 용두산 공원으로 이어지던 구름다리 '미화교'의 모습. 사진은 2000년 3월 미화교를 새롭게 보수한 뒤 행사를 하던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1980년대 상권의 중심이었던 남포동과 광복동, 그중에서도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보니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했죠. 하지만 1990년대 중심 상권이 서면으로 옮겨간 데다, 1995년 부산에 현대·롯데 백화점이 들어선 이후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2001년에 문을 닫습니다. 미화당백화점이 있던 자리엔 현재 신발가게와 미용실 등이 입점했는데요. 아직도 이곳을 '옛 미화당 자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미화당백화점과 함께 중구 남포동 권역에서 활약하던 백화점이 또 있습니다. 1981년 중구 신창동 동주여고 앞에 들어선 유나백화점입니다. 1982년 삼미그룹이 유나백화점을 인수했고 80년대 미화당 백화점과 함께 쌍벽을 이뤘습니다. 서울 이태원에도 백화점을 내고 1996년 11월엔 부산 다대포에도 분점을 냈죠. 하지만 1997년 삼미그룹이 부도를 맞으면서 유나백화점 매각이 추진됐고, 결국 1999년 유나백화점도 문을 닫습니다.1990년 유나백화점 봄 정기 바겐세일 당시의 모습. 외벽에 걸린 현수막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브랜드들의 이름이 눈에 띄네요. 부산일보DB1983년 11월, 부산 향토 백화점계의 거물인 태화쇼핑이 문을 열었습니다. 1985년은 부산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하면서 부산의 중심 상권이 광복동에서 서면으로 이동하던 때였는데요. 서면 대로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고, 부산 매출 1위 백화점으로 우뚝 섭니다.태화백화점은 1991년 4월 본관을 확장하고, 1994년 11월엔 태화쇼핑을 상장하기도 했는데요. 1996년 신관도 개점하면서 덩치를 키웠습니다. 하지만 1995년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이 문을 열었고, 그 이후로 매출은 급격히 감소해 갔습니다. 규모 확장으로 인한 자금난까지 겪으면서 어려움이 가중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태화쇼핑 회장이 극단적 선택을 해 큰 충격을 주기도 했죠.1999년 태화백화점은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당시 향토기업인 태화백화점을 살리기 위한 시민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운영되긴 했으나, 결국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1년 결국 파산하고 맙니다. 지금은 (주)텐커뮤니티가 인수해 지금은 '쥬디스 태화'로 운영되고 있죠.1980~90년대 부산을 대표했던 태화백화점이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001년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사진은 2003년 태화백화점의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1991년대 동래에 생긴 '세원백화점'은 개점 1년 만에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며 부산지역 전체 매출 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곳은 특히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과 함께 있어, 부산을 오가는 이들이 자주 방문한 곳이기도 했죠. 당시 보기 귀했던 맥도날드도 입점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997년 세원백화점도 부도를 피해 가지 못하고 2000년 문을 닫았는데요. 이 자리에는 현재 롯데백화점 동래점이 들어와 있습니다.2000년 7월 세원백화점이 문을 닫기 전 마지막 고별 대처분 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DB1992년 부산 수영구 광안동에도 향토기업이 운영하는 '신세화백화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광안동이 남구에 속해 있을 시절입니다. 이곳은 운영 기업이 (주)세화수산과 세화유통이다 보니, 이 백화점은 다른 백화점에 비해 식품 판매 비중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게다가 광안동엔 백화점이 없어,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는 백화점이었는데요. 1996년엔 사하구 괴정동에 2호점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대기업 백화점의 부산 진출 이후 운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6년 문을 닫습니다.1996년 신세화백화점 괴정점 오픈 당시의 모습. 외관에 한자로 ‘신세화(新世華)’라고 쓰인 간판이 인상적인 곳이었죠. 부산일보DB1994년 해운대에도 첫 백화점인 '리베라백화점'이 생깁니다. 당시 리베라백화점은 지상 16층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1층부터 7층까지는 백화점, 8층부터 16층까지는 호텔로 썼습니다. 해운대에도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부산의 백화점 상권이 다섯 군데로 나뉘게 됐는데요. 중구는 미화당·유나, 부산진구는 태화, 해운대구는 리베라, 동래구는 세원·부산, 남·수영구는 신세화 이렇게 말이죠. 리베라백화점은 해운대 인구를 타깃으로 매출을 꽤 올렸지만, 1996년 모기업의 부도로 휘청이게 됩니다. 2003년 리베라백화점이 있던 자리엔 세이브존이 들어섰습니다.■ 그때 그 사람취재진은 부산의 마지막 향토 백화점, 신세화백화점을 운영한 (주)세화씨푸드 배기일 회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배 회장은 “당시 다른 백화점도 많았지만, 신세화백화점은 식품 코너와 수산가공품 쪽은 어느 백화점보다 뛰어났다고 자부한다”며 웃었습니다.배 회장의 말처럼 세화백화점은 모기업이 (주)세화수산이다 보니 수산물 쪽에 확실한 강점을 보였습니다. 또 배 회장이 식품 쪽 전공을 하다 보니 다른 백화점보다 식품관이 월등히 뛰어났다고 하네요.세화백화점의 전신은 ‘세화유통’이었습니다. 배 회장은 세화백화점을 시작하기 전, 1985년 동래구 온천동 럭키아파트 상가에 세화유통이라는 슈퍼마켓을 운영했는데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세화유통뿐 아니라 함께 운영하던 세화수산도 수출 1000만 불을 달성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죠.유통업에 관심이 많았던 배 회장은 세화유통의 규모를 키워 1992년 부산 수영구 광안동에 ‘신세화백화점’을 열게 되는데요. 지상은 백화점으로, 지하에는 세화유통이 들어갔습니다. 신세화백화점은 건물 외관에 한자로 ‘신세화(新世華)’라고 써뒀는데요. ‘새로운 세화’의 뜻과 함께 ‘세계화’의 의미도 담았다고 하네요.당시 남구, 수영구 인근의 유일한 백화점이다 보니 장사도 꽤 잘됐다고 합니다. 특히 명절 대목에는 하루 매출이 수십억을 기록할 때도 있었다고 하네요. 1996년엔 신세화백화점 괴정점도 문을 열었습니다.하지만, 이내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95년 서면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범일동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면서 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졌습니다. 물리적 거리가 있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주요 브랜드가 빠져나간다는 거였습니다. “롯데백화점이 생기고 나서 ‘키 테넌트(상가나 쇼핑몰에 고객을 끌어모으는 핵심점포)’가 대부분 빠져나갔죠. 롯데·현대 백화점은 비유하자면 바다 생물을 한꺼번에 빨아들이는 ‘정치망’ 같았습니다.”거대자본이 소비자를 빨아들이면서 신세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향토 백화점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 향토백화점이 운영난에 허덕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은행 대출도 막히는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부산의 1등 백화점이었던 태화백화점마저 자금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태화백화점의 회장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일은 배 회장에게도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맞설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직감한 배 회장은 결국 고심 끝에 2005년 신세화백화점을 매각하게 됩니다. “흐름이 워낙 거세서 이길 수 없더라고요. 세화수산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매각할 수밖에 없었죠.”배 회장은 아직도 그 당시 재벌 자본으로 인해 향토 백화점이 스러졌던 그 순간들이 아쉽습니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그 결정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 시절 세화유통, 신세화백화점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좋은 곳에서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배 회장에게는 고배를 마신 사업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신세화백화점을 기억해주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감사할 따름입니다.“부산 광안리나 괴정, 온천동 쪽에 살던 분들은 아직도 신세화백화점, 세화유통 얘기를 많이들 해요. ‘특히나 식품이 좋아서 많이 갔다’는 이야기 들으면 아직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 당시에 세화유통, 신세화백화점 이용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글=서유리 기자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 ④ 어린 날의 희로애락이 담긴, 추억의 영화관

    ‘레코드 부산’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오늘날처럼 대형 영화관이 생기기 이전, 1개 영화 만을 상영하는 소박한 단관극장에서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사진은 2008년 남포동 마지막 단관극장인 국도극장 2관의 내부 모습.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부산은 ‘영화의 도시’라 불리죠. 개항 이후 일본과 가까웠던 부산에는 일찍이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요. 광복 이후 부산 중구 남포동을 중심으로 극장가가 생겨나고, 서면 일대에도 극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섰습니다. 이후엔 동네마다 크고 작은 극장들이 하나씩 생겨났죠.즐길만한 거리가 영화밖에 없던 시절, 부산 시민들은 영화를 보며 지친 삶을 달래곤 했는데요. 주말이면 데이트하는 연인들 뿐 아니라 자녀들 손 잡고 온 가족들로 영화관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습니다. 일렬로 다닥다닥 붙은 좌석에 꼭 붙어 앉아 눈앞의 대형 스크린에 시선을 빼앗겼던 그 시절, 부산 극장에 담긴 독자들의 추억을 훑어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북성영화극장고 홍영철 원장의 저서 '부산극장사'에 실린 북성영화극장의 모습입니다. 1966년 촬영하나 모습이라고 하네요.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제공서면 로터리 바로 옆 서면 한 가운데 북성극장이 있었죠. 어릴 적 아버지 손잡고 서부영화나 중국 무협 ‘외팔이 시리즈’, ‘007 시리즈’를 보러 다닌 추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북성극장은 입석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성황리에 성업 중이었는데요. 어느 명절날 아버지 손을 놓쳐 울다가 영화 도중에 방송을 해서 아버지와 상봉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시작 전 슬라이드 필름으로 광고가 나왔었는데 허바허바사장, 당코리테일러, 이명래고약 등의 광고도 그립고, 상영이 끝난 막간에 울려나오던 벤처스 음악들도 그립습니다. / 부산 부산진구 61세 배병*#은아극장1993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상영 중인 은아 극장의 모습. 오른쪽 소극장인 은아스카라극장에서는 '보디가드'가 상영 중이네요.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제공어릴 때 태화백화점 옆 은아극장에서 아저씨 두 분이 페인트 붓으로 간판을 직접 그리고 색칠하셨어요. 어느 순간 일반 간판으로 바뀌면서 그분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92년도 국민 학생일 때는 영화비 하나를 결제하면 두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그때 우뢰맨이랑 다른 영화도 같이 본 기억이 나네요. 애들 영화는 영화관에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본 기억이 나요. 문화생활 즐길 거라곤 어린이대공원, 금강공원밖에 없어서 영화관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관 매표소 아래에 쪽자, 오락기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부산 동구 43세 노진희■ 부산 극장의 역사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이 쓴 ‘부산극장사’에 따르면, 부산에는 해방 이전 23개의 극장이 있었습니다. 첫 극장으로 알려진 '행좌(남포동)'부터 시작해 '송정좌(남포동)', '부산좌(부평동)', '국제관(중앙동)', '태평관(창선동)', '소화관(창선동)', '동래극장(수안동)', '부산극장(남포동)'등이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23곳 중 부산 사람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극장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또 오늘날처럼 서구형 극장건축양식이 아닌 전통 일본식 극장의 형식으로 지어졌죠.그래서 극장 이름에도 일본식인 ‘좌’나 ‘관’이 붙었습니다.초창기 극장은 대부분 연극 전용극장이었습니다. 실사나 희극 등의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 역시 상영시간이 10분 내외로 짧은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점차 '발성영화(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간혹 일부 극장에서 '발성영화(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지만, 보편적이진 않았죠.1958년 7월 한중합작 '그림자 사랑(김화랑 감독)'이 상영 중인 부산 극장의 외관 모습.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제공이런 부산에 1947년, 순수 부산 자본으로 세워진 첫 영화관이 등장합니다. 서면 로터리에 세워진 '북성영화극장'입니다.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대중문화 공간이 한 곳도 없던 서면 주민들에겐 큰 선물이었습니다.북성영화극장이 생긴 이후 1950년 문화극장, 1955년 현대극장, 1957년 대영극장·제일극장, 1961년 동명극장·왕자극장 등이 생기면서 남포동에 극장가가 형성됩니다. 서면 일대에도 영화관이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1957년 동보극장, 1962년 태화극장, 1970년 대한극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이로써 부산의 극장 지형은 크게는 중구 남포동과 부산진구 서면 일대로 나뉘게 됩니다.그 외의 지역에서도 영화관은 생겨나고 없어지고를 반복합니다. 범일동에는 삼성극장(1959), 삼일극장(1966), 보림극장(1968)이 이름을 날렸고, 동래에서는 동성극장(1969), 온천극장, 초량에도 수정극장(1957), 초량극장(1958), 천보극장(1960) 등이 생겨났죠.1962년 부산 중구 자갈치 인근에 있던 동명극장의 모습. 부산일보 DB부산 극장가는 1960년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당시 미국 서부영화와 '007 시리즈'가 개봉하면서 극장마다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1969년 연간 영화를 감상하는 횟수가 1인당 13.86회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을지 예상이 되죠?호황을 누리던 극장가는 1970년대부터 조금씩 침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가정에 TV가 보급되면서 극장을 찾는 발길도 줄어듭니다. 유신정권의 검열로 인해 침체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문을 닫는 극장도 속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문화극장, 북성극장, 현대극장 등도 문을 닫았죠.1980년대는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그 외에도 레저활동 등 여가생활을 즐기는 인구가 많아졌죠. 영화 외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많아졌으니, 영화에 관심이 소홀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겠죠. 대신 이 시기엔 좌석이 120~150석 정도로 작은 소극장이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부산에는 1983년 동아데파트에 ‘대아극장(이후 동아극장)’이 처음 문을 열면서 부산에 48곳의 소극장이 생겨납니다. 소극장 붐으로 극장가가 활기를 되찾나 싶었지만, 오히려 여러 곳에 난립하다 보니 1990년대 들어서는 하나둘씩 문을 닫고 맙니다.1993년부터는 복합영화관 시대가 도래합니다. 부산극장이 처음으로 3개의 관을 갖춘 복합영화관을 도입하는데요. 이전까지는 한 영화관에 1개관만 있는 단관 시대였습니다. 1999년 대영시네마, 2000년 씨네시티 부산 등이 문을 열었고,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브랜드들도 2000년부터 각 지역에 하나둘씩 생겨납니다.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으로 인해 극장 상권이 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다룬 <부산일보> 2000년 2월 1일 자 기사. 부산일보 DB2000년 중·후반부터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향토 극장들은 아예 문을 닫거나 대기업 자본에 흡수됩니다. 부산극장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산극장도 현재는 '메가박스 부산'이 됐죠. 남포동 BIFF광장의 상징이던 '대영시네마'도 문을 닫고, 현재는 '롯데시네마 대영'이란 이름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그때 그 사람컴퓨터 그래픽이 보편화되기 전, 각 극장 외벽엔 상영작을 알리는 그림 간판이 내걸렸습니다. 극장엔 간판을 그리는 미술부 직원들이 있었는데요. 취재진은 부산의 마지막 극장간판 미술가, 권오경 씨를 만났습니다.권 씨는 1980년, 극장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권 씨는 고등학생 때 미술부 활동도 하는 등 미술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진 못했습니다. 군 제대 후 그림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찾은 곳이 당시 남포동에 있던 ‘왕자극장’이었습니다.당시 왕자극장은 소위 ‘이류’ 극장이었습니다. 개봉작을 상영하는 ‘개봉관’은 아니었고, 개봉관의 상영이 끝난 작품을 이어받아 상영하는 곳이었죠. 그래도 영화관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밑그림부터 그려가며 그림을 배웠습니다.왕자극장에서 경험을 쌓은 권 씨는 개봉관인 제일극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함께 삼일‧삼성극장과 소극장 등 7곳을 돌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부산극장 미술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2000년 부산극장 미술부장 권오경 씨가 간판 제작 중인 모습. 부산일보DB영화 간판의 구성과 디자인은 온전히 미술부장의 몫입니다. 작은 사이즈로 그릴 수도 있고, 건물 높이만큼 큰 간판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권 씨가 작업한 가장 큰 간판은 영화 ‘호걸춘풍’이었는데요. 영화배우 이대근 씨가 한복 입고 춤추는 모습을 극장 바닥에서 옥상 높이로 그렸다고 합니다. 15~17m 정도 됐다죠. 이런 대형 간판들은 눈 따로, 입 따로 조각조각 따로 그린 뒤에 설치할 때 퍼즐 맞추듯 맞춘다고 하는데요. 그릴 당시에는 ‘이게 잘되고 있는 건가’ 감이 안 오는데, 설치해 놓고 멀리서 보면 배우 얼굴을 닮아있다고 합니다.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지옥의 묵시록’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극장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그림이 좋다. 예술성 있다”면서 치켜세워 줬다고 하네요.서울과 부산의 극장들은 그림체도 달랐다는데요. 서울의 극장 그림은 실제 사진처럼 매끈하게 그리는 게 특징이라면, 부산의 극장 그림은 ‘그림답게’ 거친 붓 터치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액션 영화일 때는 거칠게 표현하면 훨씬 힘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이 가능했다고 하네요.“요즘에야 매스컴으로 광고하지만 그 시절엔 광고가 될 만한 게 간판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영화사에서도 토 다는 것 없이 다 지원해줬죠. 극장마다 간판 경쟁도 치열했죠. 맞은편 극장에서는 터미네이터 눈에 불도 들어오게 하더라고요. 재밌는 시절이었죠.”권오경 씨가 미술부장으로 있을 당시 그린 '지옥의 묵시록' 간판.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제공2000년대 들어서는 극장가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필름 영화가 디지털 영화가 되고, 컴퓨터 그래픽이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그림간판이 필요하지 않은 시절이 됐죠. 이미 주변 극장에서는 그림 간판을 떼고, 사진 간판을 붙이던 때였습니다. “예상은 했죠. 주변에선 점점 없어지고 있었는데 부산극장 사장님이 그림을 좋아하셔서 우리는 다른 데보다 1~2년 정도 늦게 뗐죠. 시대가 변하면서 없어진 직업이 된 셈이죠.”2003년, 극장 그림 간판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극장을 떠났지만 아직 붓은 놓지 않았습니다. 권 씨는 극장을 그만둔 후로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현장 상황에 여유가 생기면, 틈날 때마다 순수 미술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시너 냄새로 ‘두통’이란 직업병이 따라다녔지만,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참 재밌었죠.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커피숍에 앉아서 치열하게 고민도 했고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셨던 제 스승님, 유용부 부장님을 비롯한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글=서유리 기자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 ⑤ 무아·필하모니, 청춘을 보낸 음악감상실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오디오 장비가 귀했던 1960년~1970년에는 음악감상실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팝 음악을 듣곤 했죠. 사진은 1991년 부산대 앞에 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마술피리'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클래식이나 팝송, 록, 댄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죠. 또 마니아들은 집에 고가의 스피커를 두고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오늘날처럼 개인 오디오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엔 ‘음악감상실’이 유행했습니다. 다 같이 모여 DJ가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때때로 다른 이들의사연과 신청곡을 함께 듣기도 했죠. 음악다방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도 있었고, 극장식으로 의자를 두고 오로지 음악만 듣는 곳도 있었습니다.클래식 음악을 듣는 고전 음악감상실 ‘필하모니’ ‘마술피리’뿐 아니라, 팝 음악을 틀어주던 ‘무아’와 ‘랩소디’ 등등. 추억의 음악 감상실과 함께 청춘을 보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무아1970~90년대 부산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음악감상실 '무아'의 내부입니다. 사진은 1995년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무아는 87학번인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갔던 곳이에요. 국문과 다니던 친구랑 거기가 아지트였죠. 디제이가 전해주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 마시고 속닥거리다가 졸다가. 피곤한 젊음을 쉬었던 곳이에요. 서로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지금 생각하면 대책도 없는 고민을 이야기했었던 것 같아요. 서로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 이상 없었으니까요. 그 친구와 이제는 연락이 끊어졌지만, 친구도 그때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산 부산진구 54세 여상은#필하모니스무 살 때 광복동에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에 일본식 허름한 목조건물 2층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를 따라갔는데 거기가 필하모니였어시요. 그때 음악이 '보테시니'의 '그랜드 듀오 콘체르탄트'였는데, 좋은 오디오로 들으니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부터 하루도 안빠지고 매일 음악 들으러 갔어요. 커피도 그때 처음으로 마셔봤네요. 그날 이후로 클래식은 제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짚고 일어설 수 있는 큰 힘이 됐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필하모니를 운영해주신 조 실장님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산 해운대구 58세 이욱희■ 고단한 청춘의 휴식처, 음악감상실광복 이후 ‘클래식’ 음악이 고급문화로 여겨지면서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이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도 클래식 바람이 불었습니다.1950년대부터는 부산 곳곳에서 음악감상회가 열립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을 전문가들이 해설해주는 방식이었죠. 처음엔 주로 다방에서 감상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다 전문적인 음악감상실까지 등장합니다. 특히 광복·남포동에 클래식을 틀어주던 음악다방·음악감상실이 모여 있었죠. 부산에는 강변, 에덴다방, 오아시스, 크라식, 미화당음악실, 필하모니 등등이 있었습니다.1981년 광복동에 문을 연 고전음악감상실 '필하모니'는 여러 번 문을 여닫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1988년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필하모니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곳인데요. 1981년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앞에 문을 열었으나, 1989년 불이 나면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1990년엔 필하모니 재건을 위한 음악회까지 열렸다고 하니, 당시 부산 음악계와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었는 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광복동에서 광안리, 김해로 옮겼던 필하모니는 2002년 부산 남구 대연동 문화회관 옆에 음악 카페 형태로 문을 열었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1990년 필하모니 음악감상실 재건을 위해 부산의 음악인들이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고 하네요. 위 사진은 1990년 9월 12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클래식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대중음악 ‘팝송’이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970년대엔 부산의 전설적인 음악감상실 ‘무아’가 문을 열죠. 광복동 용두산공원 계단 옆 5층 건물 중 4층에 있었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무아에 죽치고 앉아있는 ‘죽쟁이’도 있었죠.무아는 오전 시간대나 오후 5시~6시쯤 클래식 음악을 틀기도 했지만, 주로 ‘팝’ 음악을 틀었습니다. 낮에는 대학생, 재수생이 저녁에는 직장인이 찾아 와 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는 곳이었죠.이 시기에 광복동의 ‘별들의 고향’도 인기였습니다. 무아가 극장식 의자에 앉아 음악을 즐기는 곳이었다면, 별들의 고향은 술과 함께 노래를 곁들이는 펍 레스토랑에 가까웠죠. 서면에는 ‘랩소디’, ‘그라마폰’, ‘예그린’과 같은 음악감상실도 문을 열었습니다.하지만 1990년대 접어들면서 가정용 오디오와 CD플레이어 등이 보급되면서, 음악 감상실을 찾는 발길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DJ뿐 아니라 누구나 음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죠. 이제는 모여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생소할 정도로, 추억 속의 공간이 되고 말았네요.1970년~80년 대 청춘들의 휴식처가 된 무아 음악실은 1990년대 폐쇄 위기를 맞습니다. 광복동에서 부산대로 옮겨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죠. 위 사진은 1994년 7월 4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 DB■그때 그 사람취재진은 무아의 전성기 시절 DJ였던 최인락 씨를 만났습니다. 최 씨는 1980년 초까지 형의 이름인 ‘최길락’으로 활동을 하다, 1983년 이후로는 본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탓에 아직도 그를 ‘최길락’으로 아는 분들도 많다고 하네요. 지금은 부산교통방송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최 씨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커 왔습니다. 그룹 사운드 활동을 하는 형들 덕분에 초등학생 때부터 팝송을 자주 들었다고 하네요. LP 속지에 빼곡하게 쓰인 곡 정보들을 보면서 음악의 세계를 넓혀갔습니다.“초등학교 5학년 때 이발소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을 듣는데 ‘비틀스’의 ‘옐로우 서브마린(Yellow submarine‧노란 잠수함)’이 나오더라고요. 혼잣말로 노래 제목을 맞히니까 이발사가 깜짝 놀라면서 다른 노래도 맞혀보라며 신기해 하셨죠. 어릴 때부터 또래들보다는 팝송을 많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DJ 일은 남포극장 자리에 있던 ‘돌 다방’이란 곳에서 배웠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을 시작하다 보니, 형님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보조 DJ로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로 금방 메인 DJ가 됩니다. 그러다 1980년, 무아에 DJ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가 한 번에 붙습니다. 그때가 겨우 스무 살 이었죠.그는 그 시절 무아의 모습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면 입장료를 받는 카운터가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낸 뒤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극장식으로 배치된 의자 250여 개가 놓여있었죠.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엔 DJ박스가 있었습니다. 사방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내부는 꽤 어두운 편이었는데, DJ가 있는 스튜디오만 환했다고 합니다. DJ가 바뀔 때마다 조명의 색깔도 바뀌었다고 하네요.1980년 당시엔 입장료가 250원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곳이 100~150원 정도였으니, 그 시절 꽤 비쌌던 편이죠. 입장료를 내면 입장권을 주는데, 그곳에 신청곡과 사연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한쪽 귀퉁이를 잘라서 직원에게 전해주면 음료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분말 오렌지주스를 타 주고 겨울엔 생강차를 줬는데, 이후에는 요구르트로 통일됐다고 하네요. DJ는 5~6명 정도가 교대했습니다. 같은 시간대에 찾는 손님들이 여러 DJ를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표는 매번 바뀌었다고 하네요.무아 4층 입구 앞에 있던 시간표에서 찍은 최인락 씨의 모습입니다. 본명이 아닌 '최길락'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보니, 1983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되네요. 최인락 씨 제공사계절 중에는 겨울에 손님이 가장 많았고, 비 오는 날이면 앉을 자리가 없어서 긴 줄이 이어졌다죠. 손님이 많은 날엔 4층에서 1층까지 줄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손님이 나와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인 ‘무아 프리스테이지’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당시엔 무아에 가야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어요. 손님들도 음악을 듣는 깊이가 달랐죠. 당시 금지곡이었던 곡들도 무아에서는 들을 수 있었고요. 또 한 곡에 10분이 넘어가는 다소 난해한 곡들도 틀 수 있는 곳이었죠.”최 씨는 무아에 진득하게 오래 머문 DJ는 아니었습니다. 1980~1985년 사이에 다른 라디오 방송 진행을 맡게 되면서 여러 번 들락날락합니다. 그 사이 부산CBS와 울산MBC, 제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죠. 1989년엔 부산MBC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가 됐고, 1992~1993년 즈음에 무아에서 게스트DJ로 나와 진행을 하기도 했습니다.최 씨는 그 시절 무아를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무아 복원을 위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2019 무아 프리 스테이지’라는 행사를 열어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를 매년 이어가려 했지만,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잠시 쉬어가야만 했죠. 특히나 지난해는 무아 50주년이었다고 하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모일 수가 없어서, 올해 6월에 기념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네요.“지금도 가끔 무아에서 멘트하는 꿈을 꾸거든요. 무아는 제 인생의 여러 페이지를 차지하는 곳이죠. 제가 평생 DJ로 살 수 있도록 해준 곳이기도 하고요. 어느 날 무아 동창회가 열리면, 무아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추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대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글=서유리 기자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 ⑥ 동보서적 앞 기다림도 추억이 됐다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부산 서면 만남의 장소였던 동보서적 2010년 모습. 지금 이 자리에는 화장품 판매점이 들어와 있습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동보서적 앞에서 만나자!”30년 동안 부산 시민의 약속 장소였던 곳, 동보서적이 문을 닫은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동보서적을 모르는 세대는 이곳을 옷 가게로 알고 있을 테죠.과거 부산에는 동보서적과 같은 향토 서점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면 권역엔 동보서적과 영광도서가 있고, 남포 권역엔 문우당, 광복문고, 문창서점, 남포문고 등이 있었죠.보수동 책방골목에도 골목마다 헌책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 전 가장 큰 규모인 대우서점이 문을 닫았고, 최근에는 오피스텔 건립 공사로 골목 입구를 지키던 서점 8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서 옛 정취를 느끼기 어려워졌죠.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꺼내 읽던 그 시절, 부산의 서점과 함께 추억을 새긴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동보서적2002년 부산 서면 동보서적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2004년 동보서적에서 아르바이트했어요. 당시 영풍문고 서면점이 쥬디스태화 신관에 오픈해서 고객인 척 염탐 갔던 기억도 나네요. 영광도서와 동보서적이 라이벌 관계였지만, 서면에 대기업 서점들이 차례로 생기면서 향토 서점이 힘을 모았던 기억도 나요. 홈플러스 아시아드·센텀시티점에 동보서적 지점도 있어서 물품 배달도 갔었죠. 그리고 당시엔 콘서트 티켓 판매처가 주로 대형서점이어서 아이돌 팬들이 줄 서 있던 모습도 생각나네요./ 부산 북구 41세 김**#대우서점2020년 8월 보수동 책방골목의 모습. 대우서점 김종훈(왼쪽) 사장. 부산일보DB20년 전쯤 사진학과 학부 시절 때 보수동 책방골목에 있던 대우서점을 알게 됐어요. 대우서점은 디자인·미술 도서 전문점이라 구하기 힘든 책들을 참 많이 갖고 있던 곳이었죠. 사장님과 친분이 쌓여서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사진집을 부탁드렸는데, 덕분에 일본 인쇄판 사진집을 상당히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인쇄 기술과 일본 기술에 차이가 있어서 같은 사진집도 일본이나 독일판 사진집이 최고였죠. 없어져서 참 아쉬운 공간입니다. / 부산 동래구 43세 장정우#문우당서점문우당 서점은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 옆에 위치한 데다 남포동 번화가와도 가까워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죠. 사진은 2010년 10월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문우당은 친구들 만날 때 만날 장소로 정해지곤 했어요. 일단 거기서 만나 극장가를 가거나 커피숍을 가거나 아니면 거리를 쏘다니거나 했었죠. 친구가 좀 늦어지거나 내가 일찍 도착한 것 같으면 서점 안 책들을 둘러보고 읽어볼 수 있어서 좋은 장소였어요. 그러다 책에 빠지면 친구는 밖에서, 나는 서점 안에서 기다리며 서로 화내는 '웃픈(웃기면서 슬픈)' 상황도 생겼던 기억이 나네요./ 부산 부산진구 54세 여상은■ 사라지는 책방동보서적은 1980년 부산 서면 중앙대로 큰 길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단골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동보서적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상대가 늦으면 그 김에 책 구경도 하곤 했습니다.2000년대 이전까지는 서점에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참고서나 문제집을 사려는 학생부터 아이 손잡고 동화책을 사러 나온 가족, 시나 소설책을 보러 온 문학소년·소녀, 연구에 필요한 책을 구하는 대학원생까지.동보서적은 지역 문화계에도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서점 한 쪽의 공간을 지역 작가와 지역 출판사에게 내어주기도 했죠. 지역 출판사가 펴낸 책과 지역 문인이 쓴 책을 소개하는 월간 서평지 '책소식'도 발행했습니다. '어린이 글쓰기 공모대회'나 '청소년연극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열어 학생 때부터 문화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죠.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서울의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동보서적과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왔습니다. 대형 서점의 공세에도 여전히 발길은 이어졌지만, 책 구매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다가, 그 책을 스마트폰으로 찍어가서는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죠. 인터파크, 알라딘, 예스24 등 온라인 서점이 점점 몸집을 불려가던 때였습니다.언제나 그 자리를 지킬 것만 같던 동보서적은 2010년 10월 1일, 결국 문을 닫고 맙니다. 당시 서점 측은 폐업 이유에 대해 "5년간 누적된 적자로 경영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설명했습니다.2002년 서울의 대형 서점 교보문고의 부산 진출을 앞두고 부산지역 문학인들이 동보서적 앞에서 교보문고 진출 반대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DB서점의 운영난은 부산의 오랜 문화유산인 보수동 책방골목도 비껴가지 못했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70여 년을 이어온 부산의 문화유산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헌책을 내다 파는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이면서 책방 골목이 형성됐습니다. 1970~80년대엔 70개가 넘는 서점이 있었지만, 이제 서른 곳 남짓 남았습니다. 이곳도 인터넷 중고 서점과 대형 중고 서점의 부산 진출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설상가상, 이곳이 관광지로 주목받으면서 임대료는 올랐습니다. 2년 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우서점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지난해에는 골목 초입에 오피스텔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점 8곳이 한꺼번에 문을 닫았죠.1996년 10월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서점들은 오피스텔 건립으로 인해 자리를 옮기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부산일보 DB동보서적이 문을 닫은 2010년, 문우당 서점의 폐업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문우당 서점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었죠. 1955년 범내골에서 시작해 1973년 남포동 자갈치 시장 옆으로 이전했습니다. 위치 덕에 찾는 이도 많았고, 지도와 해사도서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어서 단골도 많았죠. 영광도서, 동보서적과 함께 대표적인 향토 서점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하지만 IMF 이후 경기 침체로 누적된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롯데백화점 안에 영풍문고 광복점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문우당 측은 폐업 소식을 전하면서 "어떻게든 운영해보려 했으나 오랫동안 누적된 적자 규모로 볼 때 더 이상 운영하는 것은 직원들에게마저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놓으려 한다"고 전해왔습니다.오랜 역사를 지닌 문우당 서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서점 직원이었던 조준형 현 대표가 서점을 인수하면서 명맥을 이어갑니다. 5층 규모였던 문우당 서점은 남포문고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9년에는 중앙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겨 67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문우당 서점은 자갈치 시장 옆에서 남포지하상가 11번 출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9년 중앙동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깁니다. 이 사진은 남포 지하상가 인근에 있던 2018년의 문우당 서점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그때 그 사람취재진은 1978년부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대우서점을 운영한 김종훈 사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대우서점은 책방골목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점이었는데요. 임대료 상승과 보수동 책방골목의 개발 압력 등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2020년 보수동을 떠나 섬진강 자락인 전남 구례군으로 점포를 옮겼습니다. 김 사장은 <부산일보>의 연락에 반가운 인사를 건네왔습니다.보수동 책방골목 내 대우서점을 운영한 김종훈 사장. 부산일보DB김 사장은 1976년 제대 후 부산에 정착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책방을 들락거리며 책 읽기를 좋아했던 김 사장은 숙소인 동광동에서 가까운 보수동 책방골목을 자주 드나들었죠. 단골 책방에서는 손님들이 말하는 책을 찾아주기도 하면서, 책방 주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1978년 가을쯤, 대구서점 사장이 책방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만사 제쳐놓고,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책방을 인수했습니다. 당시엔 돈이 없던 터라, 간판도 최소한으로 바꾸기 위해 '대구서점'에서 'ㄱ'만 바꿔 대우서점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지어놓고 보니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김 사장은 책방을 물려받으면서, 전문화 전략을 세웠습니다. 만화나 무협지, 아동도서 등을 골라 내 다른 책방에 넘겼습니다. 그 자리를 인문학 서적과 대학교재, 원서 등 전문서적으로 채워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다른 서점에선 취급하지 않는 책이었죠.전문 서적으로 채우다 보니,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나 논문을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자료를 찾을 수있는 방법이 책밖에 없었죠. 게다가 김 사장은 책의 면면을 알고 있어서, 필요한 책을 이야기하면 그 많은 책 더미 사이에서 척척 골라내기도 했습니다. 이 능력이 입소문을 타면서 교수나 선배 소개로 이곳에 발을 들인 이들이 오랜 단골이 되기도 했죠.단골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책방의 규모도 점점 커졌습니다. 한 칸짜리 서점은 네 칸으로 늘어났습니다. 책에 목마른 단골을 모아 '대우독서회'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우독서회는 김 사장이 떠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네요.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전성기였습니다. 특히나 새학기에는 교재나 참고서를 사러오는 사람들이 많아 골목을 지나다니기 힘든 정도였죠.1999년 2월 28일, 새학기를 앞두고 참고서 등을 구입하기 위해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2010년에 접어들어서자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새학기 특수가 없어졌다는 것. 인터넷이 발달하고 모두가 스마트폰을 갖게 된 이후부터는 책방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이제 여기가 아니라도 책을 구할 수 있게 된 거죠. 나도 인터넷 판매를 꽤 일찍부터 시작하긴 했는데 관리할 능력도 없었고, 여기 오는 손님 챙기기 바쁘니까 인터넷 활용을 못한 거죠. 그게 두고두고 아쉬워요."줄어든 손님 만큼 매출도 떨어졌지만, 한 번 오른 임차료는 내릴 줄을 몰랐습니다. 특히나 점포 네 곳을 빌린 김 사장의 임차료 부담은 더욱 커졌습니다. 설상가상 2018년 연말에는 임차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면서 막막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보수동을 지키고 싶어 점포를 매입하는 방법도 알아봤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죠.30만 권이나 되는 책을 옮길 곳을 찾다, 지인의 소개로 섬진강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정착한 곳은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구례였죠. 지금은 북카페처럼 커피를 마시며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우서점이란 이름은 '섬진강 책사랑방'으로 바꿨습니다. 사랑방처럼 들러, 책을 보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된 거죠.보수동에서 시작된 인연은 섬진강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우서점이 옮겨갔다는 소식에 부산·경남뿐 아니라 경북 서울 지역에서도 찾아옵니다. "보수동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우서점을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신 분들께 참 감사하죠. 책을 아끼는 분들이 일부러 시간내서 와주신 모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네요. 그분들 덕분에 대우서점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요."어쩔 수없이 보수동을 떠났지만, 옛 모습을 잃어가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이야기에 아직도 마음이 아립니다."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 문화의 자존심이에요. 부산시나 중구청에서도 이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참 안타깝죠. 부산 시민들이 책방골목을 꼭 지켜주시길 바랍니다."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 ⑦ 서면 학원가에 학생이 쏟아지던 때가 있었지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1989년 부산 부산진구에 위치한 부산단과학원 앞의 모습. 학원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눌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죠. 물론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한 번쯤 학원에 가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괜히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고, 더 공부하고 싶은 의욕에서일 수도 있죠.부산은 서울 못지않은 대도시였고, 명문 학교들도 많았던 덕분에 학원도 성행했습니다. 특히 서면 학원 골목에는 수업 마치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곤 했죠. 부산에는 경남학원, 청산학원, 부산학원, 서면문리학원, 혜화문리학원, 현광문리학원, 서전학원, 대신학원 등이 운영되다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추억이 된 그 장소. 그 시절 학원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독자들의 사연을 만나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현광문리학원2000년 중반쯤, 지금은 경찰학원이 많은 서면 학원 골목에 현광문리학원이 있었어요. 근처에 혜화문리학원도 있었고 단과학원이 많았었네요. 그때만 해도 부산에 학생들도 많았고, 인터넷 강의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라서 다들 단과학원 많이 다녔어요. 유명한 선생님들 강의 들으러 줄서고 했는데, 사람이 진짜 많아서 빨리 안 가면 엄청 뒤에 앉아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만 해도 부산 학원 거리가 노량진 뺨치는 정도의 인기였던 것 같아요. / 부산 연제구 32세 이*영#서면문리학원1989년 서면문리학원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서면문리학원 건물과 옆 건물 사이 좁은 신문 가판대가 아버지의 일터였습니다. 아버지는 나이 90이 되도록 27년 가까이 엄마와 함께 그 자리를 지키셨죠. 저도 대학생 때 방학이면 가판대 일을 도와 드리기도 했었네요. 그러다 엄마가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6개월 정도 아버지와 제가 그 가판대를 지켰어요. 당시엔 서면 학원 거리에 재수생뿐 아니라 직장인도 영어 공부하느라 많이들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 덕분에 우리 집 살림살이도 많이 나아졌지요. 참 추억의 서면 학원 동네입니다. / 부산 부산진구 54세 정*숙#서전학원2007년 부산 동래구 서전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칠판을 보니 국어 수업인 듯 보이네요. 부산일보DB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1995년~1997년 2월까지 동래 서전학원 다녔어요. 처음 다닐 땐 서전학원이 아니라 '문봉학원'이었고, 1996년도에 서전학원으로 이름 바뀌었어요. 동래시장에서 멀지 않았던 곳에 있었는데 1996년에 명륜초등학교 근처 새 건물로 이사 갔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 들어갈 때 반편성고사도 치고 수준별로 반도 정했어요.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학원이어서 맨날 영어단어 외워서 시험 치고, 학원에서 정기적으로도 시험도 쳤네요. 토요일에도 나갔던 것 같아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립네요. /부산 해운대구 38세 장지원■ 시대에 따라 변한 학원요즘 중·고등학교는 소위 '뺑뺑이(무작위 추첨)'로 가죠. 1960년대만 해도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진학했는데요. 명문 중학교 입학이 곧 명문대 입학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보니,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하기도 했다죠. 이 탓에 사교육 열풍이 입니다.하지만 1969년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니, 고등학교 입시가 과열됐습니다. 부산에서도 이 시기 이름을 떨치던 학원이 있는데요. 부산 서구 대신동의 '경남학원'과 동구 초량동의 '청산학원'이었습니다. 경남학원엔 경남고 출신 강사가 많았고, 청산학원엔 부산고 출신이 많았다고 하네요.19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사교육은 본격적으로 대입 입시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다 1980년 '7·30 교육개혁 조치'가 내려지면서 재학생이 학원에 다닐 수 없게 됐죠.1980년 경남학원 앞에 '당국의 지시에 의해 8월 1일부터 중·고등 재학생의 수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알림 글이 붙어있습니다. 부산일보 DB1980년엔 재수생들만 학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국의 단속도 이뤄졌지만 사복을 입고 와 몰래 수업을 듣는 재학생도 있었다고 하네요.이 시기 부산에서는 범천동 '부산학원'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을 모두 가르치는 종합학원이었죠. 당시 부산뿐 아니라 경남, 울산, 경북, 전남 등지에서도 몰려들었다고 하네요. 재수생 종합반이 있었고, 단과반도 운영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면 학원 거리에는 서면문리학원, 부산단과 학원이 들어섰습니다. 서면 광무교 근처 혜화여고가 있던 자리에는 혜화사관학원도 들어섰죠.1989년 6월부터 중·고등학생이 방학 중에는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고, 1990년대 초에는 학원 관련한 규제가 풀리면서 학원가는 호황기를 맞이합니다.1990년대 학원가는 주거지 이동에 따라 본거지를 옮겨갑니다. 양정로터리, 연산로터리, 동래로터리 쪽으로 중심이 옮겨가고, 이후엔 수영구, 해운대구로도 옮겨가죠. 양정한샘학원 연산한샘학원, 동래구 대동학원·서전학원·대신학원, 수영구 성문학원, 해운대구 서전·성문학원 등이 학생들을 끌어들였습니다.2003년 동래 대신학원의 수업 모습.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2000년대엔 동네 곳곳에 보습학원도 우후죽순 생겼습니다. 속셈학원에서 발전한 보습학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소소하게나마 동네 학생을 상대로 운영되어 왔죠. 또 영어와 외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학원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그러나 2000년 중·후반, 개인 PC와 휴대용 동영상 플레이어(PMP)가 보급되면서 '인터넷 강의(인강)'가 보편화됩니다.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강사에게 쏙쏙 뽑아 들을 수 있으니, 단과학원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면의 학원가도 크게 타격을 받았죠.KTX의 개통도 학원계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부산~서울을 2시간 30분 만에 오갈 수 있으니, 주말 동안 서울 유명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생겨났죠. 또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이 기숙학원 사업을 확장하면서, 부산지역의 재수생마저 흡수해갔습니다. 2010년대엔 부산혜화사관과 부산학원이 통·폐합 됐고, 기숙 학원들은 모두 경남 김해나 양산, 울산 등지로 옮기면서 부산에는 기숙학원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수강생들이 줄어들면서 부산학원과 혜화사관학원이 통폐합 한 내용을 다루는 <부산일보> 2014년 2월 26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부산학원총연합회 명예회장이자 대동학원 대표인 송긍복 대표는 "학령 인구는 줄어드는데 대입 정원은 대폭 확대되고, 학원 인가기준은 완화됐다. 예전엔 대형 학원만 운영할 수 있었는데 곳곳에 보습학원이 생기면서 규모가 큰 학원들이 서서히 문을 닫게 됐다"고 말합니다.중·고등학생과 재수생들로 붐비던 서면 학원 골목엔 어느덧 공무원·경찰 등을 준비하는 고시생들만이 남게 됐죠."한 때는 부산이 서울보다 학원이 잘 됐어요. 서울 강사들이 부산 시장 장악하려고 내려 왔는데 부산 강사들을 이겨 내지 못했다니까. 물론 지금 부산에 계신 분들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만, 예전 명성만 못 하죠." 송 대표의 말에서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 그때 그 사람2000년 부산 서면 학원 골목에는 '현광문리학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유명 강사 두 명이 함께 차린 단과 학원이었는데요. 영어 과목에 현광식, 국어 과목에 김광휘 두 강사가 함께 만든 학원이죠. 두 강사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현광'으로 지었습니다. 취재진은 부산과 서울에서 유명 국어 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김광휘 씨를 만났습니다.부산학원 국어 강사, 현광문리학원 원장, 부산종로학원 원장을 역임한 김광휘 씨의 모습입니다. 2014년 이후 학원 강사로서는 은퇴했지만, 아직 과외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서울 영등포구 출신에 인천교대를 나온 김 씨는 20대 초반까지 부산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 생활을 부산에서 하고, 제대 이후 중등 임용을 치면서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죠.그러다 1968년 군대 선임의 부탁으로 부산 서면 대한극장 옆 ‘한성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시대 셔츠, 범표 신발 공장에서 근무하던 ‘공원’들이 검정고시를 치기 위해 다니던 학원이었습니다. 수강료를 안 받다 보니 월세를 내지 못했고, 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말죠.이후 김 씨는 서면 복개천 근처 방직공장을 빌려 대안학교 격인 ‘부일재건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습니다. 이곳 역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강사들과 함께 5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죠. 수강료를 받지 않으니 운영난은 절로 따라왔고, 학교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집도 팔았지만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생활은 해야 하니, 학원에 들어가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72년 처음 들어간 곳이 부산진구 범천동에 있던 범일 학원이었습니다. 이 학원은 이후 ‘부산학원’이라는 부산에서 가장 큰 대형학원이 되죠. 당시 국어는 김광휘, 영어는 옥진수, 수학은 박영돈, 사회는 송긍복 선생이 맡았습니다.그는 '선생은 학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종합반 담임일 때 수시로 당구장에 도망가는 재수생을 붙잡아 엄하게 가르치고는 고려대 법대에 보내기도 했죠.1990년 부산학원의 전경입니다.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의 유명 대학에 수강생들이 많이 합격했다. 부산일보DB김 선생은 1982년엔 서울로 올라갑니다. 서울 성지학원과 서울역 옆 대일학원도 거쳤죠. 소위 '1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부산학원에서 다시 와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1~2년 정도만 있으려 했지만, 결국 눌러앉았죠. 부산학원 단과반 부원장도 하고 이후엔 종합반 수업도 했습니다. 그러다 독립해 동래구청 근처에 재학생 학원인 '관악학원'을 운영했죠.2000년,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부산에서 유명 영어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현광식 선생이었죠. 현 선생의 제안으로 서면에 현광문리학원을 엽니다. 현광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강의는 꾸준히 했습니다.2000년대 중반, 단과학원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당시는 학원의 ‘브랜드’가 중요하던 때라서 서울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부산에도 이름 있는 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부산종로학원 원장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강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관리자의 삶을 살았죠. 2014년엔 부산종로학원을 그만두면서 학원 강사로서의 삶을 마치는 듯했습니다.1년 정도 강의를 쉬고 있었는데, 후배와 제자들의 성화에 다시 수업을 하게 됐습니다. 2015년부터는 남천동의 한 학원의 공간을 빌려 과외 수업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그는 '읽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는데요. '읽는 법만 제대로 배우면 중3도 수능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요즘은 주말에만 수업을 하고, 평일에는 자료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하면 '열 마디 대신 한마디 말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일주일을 보낸다고 하네요. 이제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내년부터는 진짜 쉬어볼까 하는 고민도 안고 있다네요.지금껏 김 선생을 거쳐 간 제자가 수만 명은 넘을 겁니다. 고단한 수험생 기간을 견뎌내고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제자들에게 안부를 건넵니다.“제가 학생들한테 ‘태어난 새는 창공을 날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꿈을 가지고 살라는 말도 했고요. 저를 거쳐 간 제자들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창공을 날고 있기를 바랍니다.”

  • ⑧ 마리포사 커피숍, 그 시절의 커피 향이 그리운 날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1997년 <부산일보> '느낌이 있는 집'에 소개된 부산 강서구 명지동 카페 '통나무집 TOO"의 내부 모습입니다. 간단한 음료부터 갈비구이 등의 식사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부산일보 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요즘은 번화가 어디를 가나 100m 반경에 10곳 이상이 카페입니다. 언젠가부터 밥 먹고 나면 커피나 차 한잔하는 게 일상이 됐죠. 카페 문화는 그만큼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요.부산은 예전부터 커피 문화가 빠르게 발전해온 곳입니다. 1960~70년대 남포·광복동의 다방 전성시대를 거쳐, 1980년대부터는 대학가·서면·해운대 등지를 중심으로 커피 전문점 시대가 열렸죠. 2000년대 전국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부산을 뒤덮는 와중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온 카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피 문화가 변하면서, 결국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추억 속으로 사라진 곳들도 많죠. 그럼에도 부산은 여전히 커피 도시의 면모를 뽐내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인기를 끄는 '컴포즈커피’ '더벤티' 등의 브랜드도 부산에서 처음 시작됐죠.이 순간에도 부산에 수많은 카페가 생겨나고, 또 사라집니다. 카페는 사라지지만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은 소중하게 남아 있죠.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카페,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추억을 들여다봤습니다.■그때 그 시절#마리포사1998년~99년 정도에 대학 친구들이랑 마리포사에 갔다가 벨기에 와플이라는 걸 처음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딸기잼 발라 먹으면 '꿀맛'이었죠. 3~4층에 카페가 있었고 그 아래층에 파스타랑 피자 파는 집이 있었던 것 같네요. 밑에서 파스타 먹고 후식으로 차 마시면서 수다 떨곤 했는데. 삐삐 받아서 전화할 수 있게 전화기도 있었던 것 같아요. 추억이 새록새록 해지네요./ 부산 동래구 45세 이*빈마리포사는 부산 서면 1번가 중심지에 있어 당시 단골 약속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위 사진은 1980년대 부산 마리포사 커피숍의 메뉴판 입니다. 정동웅 씨 제공#캔모아2000년대 중후반쯤 캔모아 서면점에 자주 갔어요. 고등학교 때 제빵학원 다니면서 학원 가기 전에 허기질 때나 친구들이랑 약속 있을 때 가서 눈꽃 빙수랑, 식빵에 생크림 발라 먹고 리필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과일이 엄청 듬뿍 들어 있는 과일 요거트 좋아했어요. /부산 부산진구 32세 오승현#키친테이블노블2012년까지 부산대 쪽문 삼거리에 있었던 카페인데요. 공강 시간에 친구랑 같이 종종 가서 과제도 하고 수다도 떨고 했어요. 시험 기간엔 24시간 문 열기도 해서 친구들이랑 같이 여기서 새벽까지 공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참, 카페 주인 분이 키우는 고양이랑 강아지도 있었어요. 2011년까지만 해도 삼거리에 그 카페 밖에 없었는데 이후에 노스커피, 자스민 커피 들어서면서 사라진 것 같아요. 그 자리에 더벤티 들어섰고요. 새내기 때 추억이 가득했던 곳이라 없어졌을 때 많이 아쉬웠어요. / 부산 연제구 30세 정*리■트렌드 따라 휙휙, 부산 카페 변천사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부산엔 다방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시절, 원도심 동네에 들어서는 새로운 가게는 십중팔구 다방이었다고 하죠. 특히 이 시기 다방은 예술인들이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작가 김동리는 부산 광복동 '밀다원 다방'을 배경으로 한 <밀다원 시대>라는 단편 소설을 쓰기도 했죠.1960~70년대 다방은 사업가들에겐 비즈니스의 공간, 젊은이들에겐 휴식의 공간이 됐습니다. 당시 남포동 극장 주변으로 곳곳에 다방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엔 주로 음악다방 위주였습니다. 음악을 틀어주는 DJ들이 있는 다방들이죠. 남포동에 향촌다방, 제일다방, 극동다방, 남도다방 등이 있었고 광복동 보리수다방, 해양대생의 아지트였던 백조다방도 있었습니다.그러다 1980년대로 넘어서면서 커피 전문점 시대가 옵니다. 1982년, 부산대 앞에 첫 커피전문점 '가비방'이 들어섭니다. 이후 중구 신창동의 '파트 쓰리', 서면의 '마리포사' '커피 1번지', 해운대의 '해뜨는집' '오페라' 등이 생겨나죠. 1990년대까지 커피와 함께 간단한 식사류를 파는 카페들이 인기를 끕니다. 당시엔 흔치 않았던 벨기에 와플이나 파르페 같은 디저트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죠.1999년, 국내 커피 역사에 획을 그을 한 카페가 등장합니다. 서울 이화여대 앞에 국내 첫 '스타벅스'가 입점했는데요. 스타벅스가 전국으로 뻗어나가면서 바야흐로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한 커피의 시대가 등장하죠. 가장 인기 있는 커피 '아메리카노'도 스타벅스가 들어선 이후로 익숙한 개념이 됐습니다. 2001년에는 부산에도 스타벅스 매점이 들어섭니다.스타벅스 국내 입점 이후 유행한 에스프레소 커피와 테이크 아웃의 개념에 대해 다루는 2001년 <부산일보>의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2000년대 중후반은 대형 프랜차이즈의 전쟁이었습니다. 커피빈, 카페베네, 할리스 커피, 엔제리너스, 투썸플레이스, 탐앤탐스 등 대형 프랜차이즈가 공격적으로 점포 수를 늘려갔습니다. 부산의 중심 상권인 서면과 남포동 등지에도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우후죽순 들어섰죠.2007년엔 드라마 '커피프린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카페 문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프랜차이즈 매장의 기에 눌렸던 개인 카페들도 용기를 얻게 되죠. 프랜차이즈와는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커피 맛에 치중하며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곳도 생기고, 로스팅 카페도 곳곳에 생겨나죠. 비슷한 시기 변형 카페들도 등장합니다. 북 카페, 룸 카페, 애견 카페, 모임 카페, 스터디 카페 등 커피를 곁들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가죠. 과거엔 카페가 단순히 음료나 디저트를 '먹고 마시기' 위한 곳이었다면, 점점 무언가를 '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2010년 이후부터는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도 흔히 볼 수 있게 됐습니다.그러다 2010년대 중반부터 저가 커피 경쟁이 시작됩니다. 2013년 부산진구 양정동에 커피 한 잔 가격에 한 잔을 더 주는 '원 플러스 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부산대 앞에서 시작된 '노스커피'나 '자스민' 등의 브랜드도 '테이크아웃'시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죠. 2014년 부산대 앞에 생긴 '더벤티'는 더 획기적으로 가격을 낮춥니다. '벤티 사이즈(590ml)' 아메리카노를 1500원에 판매합니다. 더벤티는 대학가와 서면 학원가를 중심으로 불티나게 팔립니다. 이후 '더리터' '컴포즈' 등과 같은 저가 커피 브랜드가 속속 생겨납니다. 2020년대에도 저가 커피 시장은 여전히 강세입니다. 부산의 토종 브랜드인 '베러먼데이' '텐퍼센트' '하삼동' '카페051' '블루샥' 등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커피 소비문화에 변화가 생기면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위기가 닥칩니다. 가장 공격적으로 매장을 확장해온 카페베네의 매장 수가 하나둘 줄어갔고, 이 위기감은 다른 프랜차이즈에도 퍼져갔습니다.2011년 7월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의 모습입니다. 엔제리너스와 투썸플레이스의 모습이 보이네요. 사진엔 찍히지 않았지만 왼쪽으로는 커핀그루나루, 탐앤탐스가 있었고, 알렉산더를 지나 200m정도 못 간 지점에 카페베네도 있었습니다. 위 브랜드 중에는 현재 탐앤탐스와 투썸플레이스만 자리를 옮겨 영업 하고 있습니다. 부산일보DB하지만, 또 무조건 저렴하다고 사랑받는 건 아닙니다. 2010년대 이후 SNS가 활발해지면서, 카페는 '핫플(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는데요. 예쁜 바다나 산, 강을 끼고 있는 카페나 화려한 베이커리와 음료를 선보이는 카페 등이 인기를 끕니다. 반면에 또 골목마다 소박한 감성을 지닌 개인 카페를 찾아가는 이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커피 맛 보다는 어떤 '감성'을 지녔는지가 더 중요해졌죠.이렇듯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다 보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가게들도 속출합니다. 2019년 'KB 자영업 분석 보고서-커피전문점 현황 및 시장 여건 분석'에 따르면, 2018년 전체 폐업매장의 절반 이상인 52.6%는 영업 기간이 3년도 되기 전 폐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트렌드에 민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만, 너무 트렌드만 좇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나옵니다. 부산에서 원두 유통 업체를 운영하며 카페의 흐름을 지켜봐 온 이호상 커피디스커버리 대표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커피를 전문적으로 해온 카페들이 이미 많이 없어졌다. 부산은 유행에도 민감한 도시고, 유행을 빨리 바꿔야 살아남는 곳이다 보니 커피 장인이 많이 없는 점이 무엇보다 아쉽다"고 짚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커피를 마시려면, 다방을 찾아야 했던 1980년대 초. 1983년 부산에 처음으로 다방과는 차별화된 '카페'가 등장하는데요. 부산대 정문 앞에 문을 연 '가비방' 입니다. 당시 가비방을 구상하고, 운영한 인물이 있습니다. 최초의 일본 커피 유학생으로 알려진 정동웅 씨입니다. 그는 부산 서면의 유명 커피숍 '마리포사'도 운영했는데요. 지금은 서면의 '가미'라는 경양식 식당에서 향긋한 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정 씨를 만나봤습니다.인터뷰 시작 전 자신이 직접 블렌딩한 드립 커피를 내려주는 정동웅 사장입니다. 향긋하고 고소한 커피향이 일품이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서울의 호텔 식당에서 일했던 정 씨는 1978년 국비 장학생으로 유럽,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유럽에선 요리를 배우고, 일본에서는 커피연구소 가라사와 소장에게 커피를 배우죠. 이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때만 해도 대중에게 원두커피가 낯선 시절이었습니다.그러다 후배들과 함께 카페를 차리기로 결심이 섰죠. 1982년 부산대 정문 앞에 '가비방' 1호점을 열었습니다. 요일별로 콜롬비아, 브라질 이런 싱글 오리진 원두커피를 팔았습니다. 토요일엔 '스페셜 블렌딩'을 팔았죠. 가비방은 부산대 학생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 씨는 부산대뿐 아니라, 동아대, 경성대, 동의대 등 대학가 중심으로 지점을 냈습니다. 가비방은 1990년대 부산에만 47개의 지점을 갖췄습니다. 오늘날 프랜차이즈 카페의 원조 격이죠.정 씨는 지점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가게에서 일할 사람들의 교육을 도맡았습니다. 2년 정도 이곳의 일을 보다, 1984년엔 서면 마리포사에 합류하는데요. 서면 마리포사와 중구 유나백화점 앞 마리포사, 서울 이화여대 앞 마리포사의 인력 관리와 운영 전반을 도맡았습니다. 이곳에서도 주로 직원 교육 담당을 맡았죠.당시 마리포사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서면 본점만 하더라도 1층부터 4층까지 모두 마리포사였죠. 처음 오픈 했을 당시엔 1~2층은 카페였고, 3~4층은 경양식을 파는 식당이었습니다. 이후 마리포사가 쇼핑몰로 전환했다가 다시 카페를 열면서, 1~2층은 피자를 파는 식당, 3~4층이 카페로 바뀌었죠.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약속 장소에 늦으면 카페로 전화를 해 알리곤 했습니다. 카페에는 전화 받는 직원이 따로 있었고, 손님을 찾는 전화가 오면 카페 내부에 방송을 해서 알리기도 했다네요.정 씨는 호랑이 선생님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특히 '서비스 정신'을 혹독하게 가르쳤는데요. 첫 일주일 동안은 손님맞이 인사부터 안내, 화장실 청소 까지 제대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정 씨는 "그래서 당시에 다른 가게 업주들이 '가비방이나 마리포사에서 일했다'라고 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채용했다"고 귀띔했습니다.그는 1990년대 다시 가비방에 합류했습니다. 점포가 1년에 30개씩 늘어나던 전성기였습니다. 그곳에는 20개월 정도 더 머무르다,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부산 하단 동아대 앞에 문을 연 가비방 2호점에서 정동웅 씨가 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정동웅 씨 제공이후로 커피 학원 강의도 나가고 프리랜서로 카페 컨설팅도 했습니다. 또, 대학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죠. 그러다 1999년엔 서면 부전시장 인근, 이 자리에 정착합니다."IMF 이후로 경제적으로 좀 어려웠습니다. 어디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하다 보니까 후배들이랑 제자들이 여기 식당을 얻어다 준 거예요. 여기 장사하면서 아들 공부 시키라고. 그 친구들한테 이자는 못 줬지만, 투자금은 다 갚았습니다. 참 고마운 인연이죠."어엿한 대학 교수가 된 제자도 있고, 자신의 카페를 멋지게 운영하는 후배들도 있습니다. 정 씨는 이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후배와 제자들은 아직도 정 씨를 찾아 고민거리를 나누곤 합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지만, 한편으론 세대가 달라져 '꼰대' 소리를 듣진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합니다.오랜 시간 부산 카페의 흐름을 지켜본 정 씨는 요즘 카페 문화가 약간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추구하기 보다, 다른 점들이 카페의 평가를 좌우하니 말이죠. 예를 들면, 커피가 맛있는 곳 보다 '오션뷰'를 가진 카페가 더 인정 받는 경향 말이죠. 또,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메뉴들로 가득한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요즘은 풍경 좋은 곳에 큰 기계 들여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커피 뽑아내는 카페가 참 많아요. 그런 집은 장사도 잘되죠. 혼자서 테이블 두세 개 놓고 커피에 집중하는 친구들은 그에 비하면 손님도 없고, 힘들 거예요. 그래도 남 보기에 좋은 것보다 커피를 제대로 하는 친구들이 오래 살아남을 겁니다. 그런 친구들이 잘되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누구보다 커피에 대한 애정이 큰 1세대 바리스타가, 커피에 대한 소신이 있는 오늘날의 바리스타에게 전하는 응원입니다.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 ⑨ 맛은 잊었어도,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식당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부산 서면에 영광도서 인근에 있던 양식당 '호수그릴'의 내부 모습입니다. 야채스프와 스테이크와 돈까스 등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죠. 사진=최승규 씨 제공.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외식이 일상이 된 시대. 요즘은 ‘집밥’마저 식당에서 사 먹곤 하죠. 하지만 국민 소득이 높지 않던 시절,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할 수 있는 행복한 사치이기도 했습니다. 외식이 흔치 않은 기회였던 만큼, 그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기도 하죠. 그 맛은 잊었어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식당에 대한 기억들은 남아있습니다.부산에는 지금까지 잘 운영되는 '노포'도 많지만, 이제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식당도 셀 수 없이 많은데요.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식당,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호수그릴서면 영광도서 인근에 있던 양식당 호수그릴의 외관. 현재는 이 자리는 횟집으로 바뀌었죠. 최승규 씨 제공초등학생 때 같은 반 단짝 친구가 '호수그릴' 사장 아들이라 가끔 갔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그릴'로 끝나는 레스토랑 몇 군데 있었지만 호수그릴이 단연코 최고의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죠. 평범한 식사 자리로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주로 어르신 회갑 잔치나 졸업식 때 한 번 가볼 정도였습니다. 유럽풍 샹들리에와 피아노 연주가 인상적이었고요. 웨이터들은 깔끔한 양복 차림의 멋진 아저씨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패밀리 레스토랑이 우리나라에 밀려오면서 이제는 추억의 식당이 됐지만 지금 그런 레스토랑이 다시 탄생해도 아주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산 부산진구 61세 문상구#일 마레서면 동보서적 위에 ‘일 마레’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있었죠. 당시 서면 소개팅 명소로 유명했어요. 저도 20대 후반에 여기서 두 번 정도 소개팅했는데 잘 안된 덕분(?)에 지금 아내 만났네요. 식당 들어가면 벽 기대앉는 자리엔 여성분들만 다 앉아 있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아는 선배도 여기서 소개팅했는데 자리를 헷갈려서 다른 분 앞에 앉기도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네요. / 부산 동래구 42세 김*준#알렉산더초등학생 때 달맞이 언덕에 있던 알렉산더 가끔 갔던 기억이 나네요. 축하할 일이 있는 특별한 날에 가는 곳이었어요. 음식보다는 공간이 특별했던 레스토랑이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어떤 음식을 팔았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외관도 화려했고 내부 공간이 이국적이어서 어릴 때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촌이랑도 같이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부산 해운대구 34세 이*영■ 외식이 ‘일상’이 되기까지과거 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 외식은 특별한 날에만 할 수 있었죠. 졸업식이나 생일, 기념일 등에 큰마음 먹고 가곤 했습니다.점차 국민 소득이 오르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식생활 양식도 변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외식 문화가 익숙해진 거죠.1989년 1월 26일 자 <부산일보> 기사는 '새 풍속도로 자리 잡는 외식지대'라는 기사에서 청소년층, 대학생층, 가족단위 음식점을 나누어 소개했는데요. 부산 서면 학원가를 중심으로는 작은 분식점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당시 500원 단위로 분식을 먹을 수 있는 '5백냥 하우스'가 인기를 끌었다네요. 또 서면역~부전역 지하상가와 남포동 지하상가 분식점도 청소년의 아지트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청소년층, 대학생층, 가족단위 음식점 등을 소개하는 1989년 1월 26일 자 <부산일보>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부산 대학가 앞에는 대학생들의 기호를 맞춘 식당들이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500원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저렴한 음식점에서부터 고급 레스토랑까지 종류도 다양했다고 하네요. 특히 80년 후반에는 대학가 앞에 전통 주점이 즐비했습니다. 학생들도 이곳에서 술 한잔 기울이곤 했죠.이 시기에는 가족 단위 외식도 크게 늘어났다고 하는데요. 보통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금정산성 쪽에는 80여 곳의 염소 고기 집이 들어섰다고 하고요. 수영구 광안동 일대에도 불고기, 갈비, 양곱창, 횟집 등의 외식촌이 형성됐다고 하네요. 해운대 지역에는 갈빗집이 주류를 이뤘다고 합니다.이 시기에 외식 문화가 익숙해졌다지만, 가족 외식 평균 횟수는 1회 미만이었습니다. 1990년 1월 24일 자 <부산일보> '과소비 "과대광고·방송 책임 크다"'라는 기사는 '소보협'이라는 소비자 단체의 외식 관련 조사 결과를 인용했는데요. 조사 결과, 가족과 함께하는 외식이 월평균 0.978번으로 나타났습니다. 외식 한 번에 드는 비용은 평균 2만 5650원이었다고 하네요.1990년대 중반부터는 외식 문화가 활발해지는데요. 식당의 종류도 더 다양해집니다. 피자, 치킨,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스테이크나 스파게티와 같은 양식 요리에도 더 익숙해지죠.1997년 한국음식업중앙회에서 성인남녀 1500명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음식문화에서도 세대 차가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하는데요. 이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74.1%는 '식사는 꼭 밥이 아니어도 된다'고 응답했습니다. 반면, 40대 이상에서는 과반 이상이 '아직도 식사는 밥'이라고 응답했네요.이 조사에 따르면 외식 유형도 선호하는 취향이 다르게 나타났는데요. 젊은 층은 한식보다 양식을 선호하고, 비싸더라도 맛있고 소문난 집을 찾아다닌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연령이 낮아질수록 '외식에 사용하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고 하네요. 요즘도 비슷한 추세죠?음식 문화에도 세대 차이가 있다는 내용을 다룬 1997년 1월 7일 자 <부산일보> 기사입니다. 40대 이상은 과반 넘는 인원이 "아직도 식사는 밥"이라고 답했고, 10대의 74.1%는 "식사는 밥이 아니어도 된다"라고 답했다고 하네요. 부산일보DB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외식비부터 줄이기 마련이었는데요. IMF 직후인 1998년 9월 16일 자 <부산일보>에는 '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 결과가 실렸는데요. 지출을 크게 줄일 세부항목에 대해서는 '외식비, 의료보건비, 의류비, 교양, 오락 문화비 순으로 줄이겠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2000년 중반엔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이 과열 양상을 보입니다. 2005년 10월 27일 자 <부산일보>는'서면지역 외식상권 경쟁 뜨겁다'는 내용의 기사를 다뤘습니다. 빕스를 비롯해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베니건스, T.G.I 프라이데이스 등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이 모두 서면에 모였다는 내용입니다.특히 서면 상권에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가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상권 안에서 2개의 점포를 운영했고, 빕스도 서면점에 이어 쥬디스 태화점을 추가 오픈해 '과열 양상'이라는 분석이 나왔죠. 패밀리 레스토랑 업체들은 서면 지역을 선택한 이유로 1·2호선 환승역으로 유동 인구가 많고,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집객 효과가 뛰어난 점을 꼽았습니다.빕스 등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가 서면 일대에 모두 모여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2005년 10월 27일 자 <부산일보>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2000년 후반에는 다양한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는 뷔페가 인기를 끕니다. 2007년 자갈치시장 현대화 건물 5~6층에 대형 해산물 뷔페인 '오아제 부산점'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해운대 신시가지에는 '드 마리스'라는 곳이 문을 열었죠. 이듬해에는 부산진구 전포동 밀리오레(현재 NC백화점 서먼점) 1층에 초대형 해산물 뷔페 '토다이 서면 밀리오레점'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한식뷔페, 고기뷔페, 스시뷔페 등이 등장하기도 했죠.2010년대 이후부터는 SNS가 발달하면서, 맛집 찾기 열풍이 입니다. 양보다 질,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문화가 됐죠. 맛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도 맛 못지않게 중요해졌고요. 또 특별한 대접도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기를 직원이 구워주는 곳도 많아졌죠. 100% 예약제로 소수의 손님만 받는 식당도 많아졌고요. 요즘은 '오마카세(주방 특선)' 식당이 부쩍 많아진 것 같죠?최원준 맛칼럼니스트는 이같은 현상을 "과거 부산은 피란민들이 모이던 곳이어서 저렴한 돈으로 푸짐하게 음식을 내어주는 문화였지만, 소득이 높아지면서 점점 고급화되고 다이닝화 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 그 사람서면 영광도서에서 서면문화로를 따라 140여m 떨어진 곳에 '호수그릴'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하야리아 부대 장교 식당의 셰프 출신인 최기수 씨가 운영하던 곳이죠. 취재진은 창업자 최 씨의 아들이자 호수그릴 부사장이었던 최승규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아들 최 씨를 통해 부산의 3대 그릴로 불렸던, '호수그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당시 스테이크를 파는 양식당에는 '그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부산에는 남포동 청탑그릴, 서면 호수그릴, 범일동 석화그릴이 3대 그릴이었다고 합니다.호수그릴은 1972년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서면교차로 현 부산은행 건물 근처였습니다. 30평 남짓한 작은 건물에서 시작했죠. 바로 근처에 당시 부산진경찰서와 부산진구청이 있었습니다. 외식 문화가 익숙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주변 관공서 덕분인지 장사가 잘됐습니다. 3년 뒤엔 롯데호텔 맞은편 큰 길가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 당시엔 롯데호텔이 아닌 부산상업고등학교가 있었죠. 영광도서 근처로 자리를 옮긴 건 1980년쯤이라고 하네요.2003년 호수그릴의 식당 내부 모습입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함께 고풍스러운 느낌의 식당이었죠. 최승규 씨 제공호수그릴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고급 양식 레스토랑이었는데요. 식당에 들어가면 샹들리에 장식이 있었고, 그랜드 피아노도 놓여 있었습니다. 서빙은 양복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전문적으로 했죠. 스테이크류는 식지 않도록 소 모양의 철판 접시에 담겨 나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특수강으로 제작된 철판이었다고 하네요. 식당 분위기가 좋다 보니, 이곳에서 선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서면 일대가 상업 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손님을 대접하는 '비즈니스맨'들이 주로 찾기도 했습니다. 2층엔 단체석도 있었는데요. 동창회나 회의, 모임 등을 이곳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로타리 클럽'도 매주 두 번 이곳에서 오찬 모임을 했다네요.호수그릴은 해운대구 송정동에도 분점인 '호수바이칼'을 오픈하는데요. 당시 송정이 떠오른다는 기대감에 문을 열었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간 탓이었을까요. 송정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가졌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나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본점의 매출로 버티면서 운영을 이어갔죠.서면 호수그릴의 분점인 송정 호수바이칼의 2003년 모습입니다. 송정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죠. 최승규 씨 제공다행히 본점은 잘 버텨줬습니다. 호수그릴이 생긴 이후로 '그릴'이라는 이름이 붙은 양식당 네 곳이 더 생겼지만, 이곳만큼 오래도록 명맥을 이어가진 못했죠.하지만 본점도 위기를 만납니다. 최 씨는 폐업 때까지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IMF와 광우병 파동, 그리고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의 등장이었죠. 앞서도 언급했지만, 2000년 중반 베니건스, 아웃백, 빕스 등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이 서면에 들어섰죠. 다른 위기는 다 넘겨냈지만, 쓰나미처럼 몰려온 기업형 프랜차이즈들은 개인의 역량으로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최 씨는 "아웃백 매장에 손님들 얼마나 있는지 가서 보기도 했어요. 저희가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 거죠"라며 씁쓸하게 웃었습니다.호수그릴은 결국 2008년쯤, 35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습니다. 이제 부산 호수그릴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호수그릴의 1대 총괄주방장이 고향인 경남 사천시에서 운영 중인 '호수 레스토랑'인데요. 호수그릴의 방식대로 야채스프, 함박스테이크, 경양식 돈가스 등을 팔고 있다네요. 올해 초 이곳을 찾은 최 씨가 인증하길, 그 시절 호수그릴의 맛과 비슷하다고 하네요.그당시 서면 호수그릴의 음식입니다. 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야채스프, 모닝롤, 등심스테이크, 안심스테이크 입니다. 최승규 씨 제공"아버지가 직접 메뉴를 개발하셨어요. 스테이크 소스도 아버지 레시피라서, 다른 곳에서는 이 맛을 느끼기가 어렵거든요. 이제 이곳에만 호수그릴의 흔적이 남아있죠."최 씨는 올해 2월, 자신의 블로그에 호수그릴 사진이 담긴 포스팅을 올렸는데요. 그 게시물에는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방문자 조회수가 찍힌다고 합니다. 최 씨는 아직도 호수그릴을 기억하는 분들을 보면 신기한 마음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서면 맛집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왔겠거니' 생각했는데, 검색어 통계를 보니까 '호수그릴'을 검색해서 들어온 분이더라고요. 문 닫은 지 10년이 더 넘었는데, 아직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 ⑩ 주말이면 부산역·조방 앞이 예식장 하객으로 붐볐지

    ‘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1986년 부산 범일동 '축복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의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요즘은 결혼식장에 온통 '웨딩홀'이란 이름이 붙지만, 2000년 이전만 해도 모두 '예식장'이었죠.과거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있었던 부산역과 범일동 중심으로 예식장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또 미남로터리, 연산로터리, 양정로터리, 동래로터리 등 로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기도 했죠. 주말이나 '길일'에는 예식장 밀집 지역이 하객으로 붐볐다고 하죠.부산에는 새마당예식장, 축복예식장, 행복예식장, 올림픽예식장, 금강예식장, 고려예식장, 새부산예식장, 백조예식장, 영남예식장, 경보예식장 등 수많은 예식장이 있었는데요. 혼인건수가 줄어들고, 결혼식 트렌드가 바뀌면서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곳들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 악재까지 덮치면서 40년 동안 결혼식장 자리를 지켜온 '새마당 예식장'도 끝내 문을 닫게 됐습니다.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예식장, 그곳에 담긴 독자들의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스타일 웨딩홀(구. 새마당 예식장)2015년 6월 스타일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린 박희진 씨 부부의 웨딩 사진. 독자 제공2015년 6월에 부산역 앞 스타일웨딩홀에서 결혼했어요. 부모님께서 하객들 오기 편한 곳에서 하길 원하셔서 이곳으로 선택했어요. 친정 언니도 여기서 했고요. 당시 메르스 때문에 걱정했던 기억도 나네요. 업체 측 실수로 결혼식 영상이 녹화가 안 돼서 그때는 엄청 속상하고 화도 났는데, 정중하게 사과 해주시고 환불 처리도 해주셔서 마음이 좀 누그러지긴 했어요. 새마당 예식장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와서 우리 아이도 거기서 결혼했으면 했는데, 없어졌단 소식 듣고는 많이 아쉬웠네요./ 부산 서구 37세 박희진#경보예식장1991년 4월 구포동 경보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홍*진 씨의 부모님 모습입니다. 독자 제공저희 부모님은 1991년 4월 7일 북구 구포동에 있는 경보예식장에서 결혼하셨어요. 중매로 만나 보름 만에 결혼하기로 하셨대요. 결혼식 올릴 돈이 없었는데 아빠 동네 모임 분들이 10만 원씩 모아서 200만 원으로 식 올리셨대요. 예식에 손님들이 엄청 많이 왔었다네요. 결혼하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두 분 아직도 알콩달콩 잘 사시는 모습 보면 너무 행복해요!/ 부산 강서구 30세 홍*진#남태평양호텔 웨딩홀저희 부모님은 1997년에 사상구 엄궁동에 있던 남태평양호텔에서 결혼하셨대요. 어머니가 술을 못하시는데 결혼식 정신없이 치르시고 피로연에서 술을 딱 한 잔 마셨는데 너무 취하셔서 그날 신혼여행도 못가셨대요. 그 이후로 저랑 동생 낳으시고 지금까지 사이좋게 잘 지내십니다./ 경남 김해시 24세 이*민■ 예식장이 웨딩홀이 되기까지부산 최초의 예식장은 1950년대 말 중구 대청동에 생긴 '대청장 예식장'이었습니다.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이용하던 곳으로, 신부들은 개조한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고 합니다. 대청장 예식장이 생기기 이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로 교회나 절을 이용하거나 '백화당' '미화당' 등 댄스홀을 빌려서 예식을 올렸다고 하네요.1960년대에는 중구 광복동을 중심으로 예식장 거리가 생겼습니다. 신신예식장, 청탑예식장, 미화예식장, 서울예식장 등이 이곳에 들어섰죠. 광복동 예식장들은 1970년대 범일동 '옛 조방' 앞에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면서 점점 명맥을 잃어갑니다.이 시기 시외·고속버스터미널을 모두 갖춘 범일동, 부산역이 있는 초량동 인근에 예식장이 생겨납니다. 금탑예식장, 영남예식장, 동화예식장, 국도예식장, 행운예식장이 생겨났죠.부산 동구 범일동 옛 조방 앞에는 행복 예식장과 축복 예식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두 예식장 모두 인기가 많아서 예식이 열리는 주말에는 일대가 북적였다고 하네요.옛 조방 앞은 80년~90년대까지도 예식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행복 예식장, 축복 예식장이 큰 인기를 끌었죠. 한국웨딩패션협동조합 유동학 이사는 "옛 조방 앞에 있던 행복예식장, 축복예식장은 예식을 30~40분 간격으로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그 예식장에 뷔페가 없어서 식권을 나눠주면 주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엔 갈비탕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예전엔 '결혼식 피로연' 하면 갈비탕이었죠.게다가 범일동에는 한복과 예물, 혼수품을 파는 부산진시장도 있고, 조금 더 가면 귀금속 상가도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경남 마산, 창원, 진주 등지에서 온 신랑 신부 부모들이 시외버스 타고 와서 결혼식장 둘러보고, 예물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원스톱' 시스템이었다고 하네요.1980년대 들어서는 지역별로 예식장이 분산됩니다. 부산역 옆에는 '새마당 예식장', 동래역 근처에는 '청기와 예식장', 연산교차로에는 '목화예식장' 등이 인기를 끌었습니다.1980년대 목화 예식장의 모습입니다. 당시 '목화 예식장에서 결혼하면 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다고 하네요. 부산일보DB이 시기에는 호텔 결혼식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호텔 결혼식이 국민 위화감을 조성하고, 도심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는 것이었죠. 부산시도 이 시기에 호텔 업주들에게 예식업을 자진 폐업하라고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호텔 업주들은 "부당한 간섭"이라면서 맞서기도 했죠. 1994년 8월부터는 특2급 이하 관광호텔에서는 결혼 예식업이 허용됐습니다. 1999년 초부터는 특1급 호텔의 예식장 영업도 허용됐죠.요즘도 예식장을 이용하면 '스드메(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1980년대에도 그랬습니다. <부산일보> 1986년 4월 23일 자에는 이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소비자는 결혼식을 올릴 장소만 이용하려고 예식장을 찾지만, 대부분의 예식장이 예식실 임대의 조건으로 신부 드레스와 미용, 사진 등을 이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빌린 드레스가 깨끗하지 않거나, 결혼식 사진이 잘못 나와서 소비자보호단체에 고발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네요.<부산일보> 1986년 4월 23일 자 신문에는 '결혼 예식장만 대여하면 갖가지 푸대접을 받기도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결혼식 자체가 경사지만, '이왕이면 좋은 날'을 따지는 경우도 많죠. 흔히 '길일'이라 불리는 날엔 결혼식이 몰리고, 예식장이 밀집된 지역에는 하객과 차량이 뒤섞여 심한 교통난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부산일보> 1991년 10월 28일 자에 따르면, 전날인 27일은 오복이 겹친다는 '오합길일'이어서 평소보다 2~3배 많은 예식이 치러지기도 했다네요.반면, '윤달'에는 결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죠. 여름철도 결혼 비수기죠. <부산일보> 1998년 6월 25일 자에는 예식장업계가 3중 악재로 허덕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예식장업계에서는 '성수기가 한 해 6개월 정도이나 윤달이 끼어 5개월 장사로 줄었다'는 한탄했다고 합니다.1994년 10월 23일은 '삼합길일'이었다고 합니다. 행복예식장 앞이 하객들로 가득차서 발디딜 틈이 없네요. 부산일보DB1990년대 후반부터는 결혼 트렌드가 바뀝니다. 변화의 중심에는 1997년 문을 연 '금강웨딩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교통의 요충지인 미남로타리 인근에 위치한 데다 유럽풍으로 지어져 당시 아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엔 주말마다 홀 4개 예약이 꽉 차서 '예약쟁탈전'이 벌어졌고, 예식이 있는 날에는 미남교차로 인근에 차가 많아서 유턴을 못 할 정도였다고도 하죠.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식장'이란 이름 대신 '웨딩홀'이란 이름을 쓰는 곳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예스러운 느낌을 바꾸기 위해서 리모델링하는 업체들도 많아졌죠. 그리고 '뷔페'가 점점 중요해집니다. 그러면서 '웨딩홀 사업'은 결국 '뷔페 사업'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부산의 유명 뷔페 브랜드 '더파티'도 'W웨딩'을 함께 운영하고 있죠.과거엔 양가 부모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이 진행됐다면 요즘엔 신랑 신부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죠. 주례 없는 결혼식, 신부 단독 입장, 신랑 신부가 직접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것도 요즘 트렌드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또 특히나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이 생겨나면서 웨딩홀별로 가격이나 조건이 한눈에 비교가 되면서 웨딩홀들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게 됐는데요. 2020년부터는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나 결혼 문화가 또 한 번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죠. 10년 뒤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그때 그 사람부산역 인근에는 40년 동안 자리를 지킨 예식장 업계의 '터줏대감'이 있었습니다. 1981년 도시철도 부산역 4번 출구 앞에 문을 연 '새마당 예식장'이죠. 새마당 예식장은 스타일 웨딩홀로,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로 이름이 바뀝니다. 취재진은 새마당 예식장의 후신, 스타일 웨딩홀의 이사였던 송병윤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송 씨는 새마당 예식장 상담 실장이었던 어머니를 도와 대학생 때부터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요. 1990년대 새마당 예식장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부산역과 가깝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죠. 요즘은 예식 시간이 70분, 90분으로 길어지는 추세이지만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예식 시간이 40~50분 정도로 짧았는데요. 송 씨는 “홀이 5~6개 정도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토요일에는 하루에 40~50쌍이 결혼식을 올렸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풀타임으로 예식이 돌아갔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예식이 열리지 않는 평일에는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새마당 예식장에서 1998년 2월 부산시인협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결혼식 문화가 급변합니다. 예식장에서 웨딩홀로 이름이 바뀌는 추세였죠. 이름뿐 아니라 트렌드에 따라가려면 뷔페도 운영해야 하고, 시설도 리모델링해야 했습니다. 당시 새마당 예식장의 임채수 대표는 상담실장인 송 씨의 어머니에게 예식장 운영을 맡깁니다.새마당 예식장은 2000년 후반에 스타일 웨딩홀로 재탄생합니다. 새마당이란 이름은 1910~20년대에 부산역 일대가 매립되면서 이곳을 새마당이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하는데요. 정겨운 데다 이미 사람들에게 친숙하기도 해서 예식장 이름을 바꿀 당시에 고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점 세련된 결혼식장을 찾는 게 시대의 흐름이었기에 결국 스타일 웨딩홀로 이름을 바꿨죠. 그래도 한동안은 ‘구 새마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붙였다고 합니다. 토목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였던 송 씨는 웨딩홀 운영을 돕기 위해 2013년부터 웨딩홀 운영 전반을 도맡았죠.2010년대 이후부터는 웨딩 트렌드가 더 빠르게 변했습니다. 2010년 중반에는 ‘하우스 웨딩’이 인기를 끌었죠. 대규모 하객을 받기보다는 소규모로, 더 고급스럽게 하는 결혼식 형태를 일컫습니다. 더 고급스러운 예식장을 만들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도 새롭게 바꾸고, 2017년엔 ‘블래어 하우스웨딩’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외관도 완전히 새롭게 바꿨죠.2016년 '하우스 웨딩' 컨셉으로 리모델링한 스타일웨딩홀의 '라벤더홀' 모습. 송병윤 씨 제공“결혼식 트렌드는 서양 문화를 많이 따라가는 것 같아요. 서울로 가장 먼저 유입이 되고, 다시 지역으로 내려오는 구조였죠. 벤치마킹하려고 서울도 자주 가고, 좋은 곳도 많이 갔는데 트렌드가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더라고요.”얼마 지나지 않아 송 씨는 웨딩업에서 손을 떼고 다시 토목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블래어 하우스웨딩 자리에는 ‘오페라 프리마 웨딩홀’이 들어왔죠. 웨딩홀 운영은 좀 더 젊은 감각의 대표가 맡고, 송 씨의 어머니는 뷔페를 운영했습니다. 웨딩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운영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잘 버텨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이 넘도록 일상을 멈추게 한 코로나19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지난해 이곳마저 문을 닫으면서, 새마당 예식장의 4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역사가 오래되다 보니까 어머니가 새마당에서 결혼하시고, 따님이 또 웨딩홀에 결혼하러 오신 케이스도 있었어요. 오래된 예식장이다 보니 건물이 낡기는 했지만, 이 자리를 지킴으로써 어떤 분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었죠.”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봤을 새마당 예식장. 터줏대감의 퇴장에서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글=서유리 기자 yool@busan.com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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